항목 ID | GC051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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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19년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
[개설]
3·1 운동은 국내외의 정세에서 발생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등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뿐만 아니라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미국 윌슨(Wilson)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는 피억압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층 고무시켰고, 당시 일제는 한국 병탄 이후 무단 폭압 통치를 실시하여 한국인은 수탈을 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3·1 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일어났다. 3·1 운동은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청년·학생·농민·노동자 등이 참여하였다.
영천 지역의 3·1 운동은 전국적인 만세 시위운동의 확산과 함께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전개되었다.
[경과]
영천 지역의 만세 시위운동은 영천군 신녕면 화성동(花城洞)에서 시작되었다. 신녕 공립 보통학교 교사 박필환(朴弼煥)은 3월 16일 밤 졸업생과 재학생을 불러 모아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행하고, 3월 26일 동료 교사 이석형(李錫瀅)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4월 6일 신녕면 완전동과 매양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농업에 종사하던 북장로파 신자 김준운(金俊運)은 4월 8일 신녕 시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촌면 입석동의 농부 홍종현(洪鍾顯)은 4월 12일 영천읍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천읍 과천동(果川洞)의 김정희(金正希)는 그날 밤 작은 칼로 손가락 끝을 잘라 흰색 명주에 한글과 한문을 섞어 ‘대한독립만세’라는 혈서를 써서 4월 13일 과천동의 노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결과]
영천군의 만세 시위는 주도자와 참여자가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탄압을 받았다. 신녕 공립 보통학교 만세운동의 주도자인 교사 박필환은 징역 1년을 언도받았고, 박필환의 영향을 받고 신녕면 완전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황정수(黃正秀)는 징역 10월, 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 등은 징역 6월, 구위준(具渭浚)은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또 신녕 시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던 김준운은 징역 1년을 받았으며, 신촌면 입석동의 홍종현은 징역 1년을 받았고, 영천읍 과천동의 김정희는 징역 8월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영천 지역민들은 강력한 반일 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운동은 1920년대 노동운동·농민운동·청년운동·형평운동 등 부분별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나아가 민족 운동의 지도 기관인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