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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년 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22
한자 永川靑年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8월 - 영천청년동맹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3년 4월 - 영천청년동맹 해체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청년들의 사회운동.

[개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대중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항일 역량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직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국 각처에서 청년회가 조직되어 계몽적인 성격의 실력 양성 운동 및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천 지역에서는 3·1 독립운동 이후 영천청년회(永川靑年會)·영천엡웟청년회(永川엡웟靑年會)·영천기독청년회(永川基督靑年會)·영천기독여자청년회(永川基督女子靑年會)·영양청년회(永陽靑年會)·영천구락부(永川俱樂部)·금호청년회(琴湖靑年會)·신녕청년회(新寧靑年會) 등이 조직되었다.

한편 3·1 독립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사상계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청년 운동을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면서 1924년 조선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따라서 영천 지역의 청년 운동은 1927년 8월 결성된 영천청년동맹(永川靑年同盟)이 주도하였고, 1933년 4월 영천청년동맹이 해체될 때까지 주도하였다.

[변천]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영천에서도 청년회가 조직되었으나 일제 경찰의 무리한 단속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1920년 7월 24일 조직된 영천엡웟청년회가 1921년 12월 5일 영천기독청년회로 개칭되었고, 1922년 7월 14에는 영천기독여자청년회가 창립되었다. 그 후 1923년 3월에 영양청년회와 신녕청년회, 1925년 9월 12일에 영천구락부, 1925년 10월 5일 금호청년회 등이 차례로 조직되었다. 1927년 8월 영양청년회가 영천청년동맹(永川靑年同盟)으로 개편되었으나 1933년 4월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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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및 평가]

1920년 청년 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근대 민족국가 건설, 그리고 청년층의 이익 옹호와 청년층의 반봉건 운동에 그 목표가 있었다. 영천 지역 청년 운동의 경우에도 전국적인 청년 운동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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