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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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이칭/별칭 | 임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상북도 영천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왜군은 경상도 지역 주요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영천성은 1592년 4월 22일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영천·신녕 지역의 의병들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각처에서 소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하여 승전하였다.
특히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영천성 복성전투는 의병과 왜군이 영천성을 두고 벌인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왜군들은 크게 패하고 경주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국내 정세는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폐단, 경제적으로 과전법 폐지로 인한 토지제 문란, 군사적으로 병농일치제의 붕괴에 따른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 실시, 외교적으로 대명 사대 외교로 일관하였다.
특히 일본과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강경책을 유지했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계기로 정식 교역은 단절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고 통일 후 여전히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다이묘[大名]들의 불만을 국외로 분출시켜 국내 안전을 도모하고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 삼아 조선 침략을 단행하여, 육군 15만 명, 수군 9천여 명을 투입하여 7년간 조선을 유린하였다.
영천은 일찍부터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로 역로(驛路)와 봉수(烽燧)가 경유하는 지역이었다. 동쪽으로는 안강을 거쳐 경주와 포항으로, 서쪽으로는 신녕을 거쳐 안계와 상주 방면으로, 남쪽으로는 경산을 거쳐 대구와 청도 방면으로, 북쪽으로는 청송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영천은 왜군이 경상좌도를 통해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고을이었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다음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는 부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 제3번대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대, 그리고 4번 대부터 9번 대까지 육군 158,700명, 수군 9,000명, 후방 경비 12,000명, 정규 부대 외 병력까지 총 20여만 명이 수륙(水陸) 양면으로 조선 침략에 동원되었다.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좌로를 선택하여 4월 19일 언양과 21일 경주를 점령하고, 22일에 영천성에 무혈입성한다. 왜군은 주력 부대는 영천성에 주둔군 1,000여 명만을 남겨 둔 채 신령현·비안면·용궁현 등을 거쳐 충주 방향으로 북상하였다. 성에 잔류한 왜군들은 영천읍성을 거점으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벌였다.
영천 지역에서는 재지사족인 유생들이 5월 초 창의하였다. 영천의 유생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정담(鄭湛)·조희익(曺希益) 등을 비롯하여 하양의 신해(申海), 신녕의 권응수(權應銖), 의흥의 홍천뢰(洪天賚), 자인의 최문병(崔文炳), 경산의 최대기(崔大期) 등이 창의하였다. 그리고 6월 초순 밀양 부사 박진(朴晉)이 경상 좌병사로 부임하여 신녕에 당도하면서 경상좌도에서 군사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영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의 의병들은 각기 부대를 편성하고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박연전투(朴淵戰鬪)는 북으로 연결되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전투였고, 7월 24일 벌어진 겁림원 전투에서 군위로 향하던 왜군을 군위 소계역(召溪驛)까지 추격하여 격퇴하는 전승을 거두었다.
한편 영천·신녕 지역을 비롯하여 하양 등 인근의 의병들은 연합 부대인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을 편성하여 7월 23일 읍성 남쪽 추평(楸坪)에 본부를 설치하고 경주·신령·하양·자인·의성·의흥·흥해·영일·대구 등지의 관군과 의병 3,560~3,970여 명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영천성 수복을 목표로 하였다.
창의정용군은 의병대장 권응수, 별장 김윤국,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전봉장 홍천뢰(洪天賚), 찬화종사(贊畵從事) 정세아·정담 등으로 진용을 갖추고, 전 병력을 좌·우·중 3대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7월 26일 창의정용군 결사대 500명이 영천성을 향해 전진하자 왜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해 왔다. 결사대가 맹렬히 공격하자 왜군들은 전사자 30여 명을 버린 채 성 안으로 달아났다.
이날 밤 창의정용군은 영천성을 포위하고 고층 누거(樓車)와 운제(雲梯) 등을 이용하여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주력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공략하고, 권응수와 박의장 부대는 서문 북문을 집중 공략하였다.
맹렬한 공격으로 왜군의 형세가 크게 약화된 틈을 타서 성안으로 들어간 의병들은 왜군의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화약고가 폭발하여 성안은 화염에 휩싸였다.
이에 마현산(馬峴山)에서는 미리 준비하여 쌓아 놓은 마른 풀더미에 불을 지르고 모래와 재를 성안으로 날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으로 성안의 왜군들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왜군은 성을 탈출하여 경주 방면으로 뿔뿔이 흩어져 패주하였고, 영천성은 수복되었다. 이 전투에서 창의정용군은 군마 200여 필을 비롯하여 조총·장검 등 무기류 900여 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8월 1일 경주성에 주둔하던 왜군은 양산의 일부 병력을 경주로 이동시켜 방어력을 증강하였다. 이에 경상좌병사 박진은 창의정용군과 관군을 통합한 공격부대를 편성하고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영천 지역의 창의정용군과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의 관군이 선두에서 공격하였으나 후방부대인 박진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양산 방면의 왜군 증원 부대가 배후에서 엄습하자 크게 타격을 입고 안강(安康)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영천 의병장 정세아(鄭世牙)·정의번(鄭宜藩) 부자를 비롯한 김대해·김여·최인제·이영근·이일장·이득룡 등 이른바 ‘고천십의사(古川十義士)’가 전사하였고, 9월 8일 의병들의 경주성 공략이 재개되어, 왜군은 울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결과]
의병 부대 창의정용군의 영천성 탈환은 경주성 탈환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왜군들은 경상좌도의 요충지를 상실하였고,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로써 안동 이하 영남좌도에 주둔하던 왜군들은 크게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