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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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通信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조선 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 막부 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
[개설]
1428년(세종 10) 일본 막부 장군 습직(襲職) 축하로부터 시작된 조선통신사는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한 역지통신(易地通信)이 행해질 때까지 총 20회 이어진 외교 사절단이었다. 서울에서 목적지까지 5개월에서 8개월이 소요되는 조선통신사의 긴 노정은 단순히 정치·외교적 의미뿐 아니라 문화 교류라는 문화적인 의미도 함께 가졌다.
조선 시대 영천은 조선통신사 행 국내 노정 2차 집결지이며 전별연(餞別宴)과 마상재(馬上才)를 개최한 지역이었다.
[설립 목적]
1403년(태종 3)에서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자 두 나라는 대등한 입장의 교린국(交隣國)이 되었고, 조선 국왕과 막부 장군은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국왕이 막부 장군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막부 장군 습직의 축하가 대부분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그때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왜구 문제, 임진왜란 직후에는 강화 교섭, 피로인(被擄人) 쇄환(刷還), 국정 탐색, 청나라 건국 후에는 탈중화(脫中華) 교린 관계 구축 등 통신사 파견 목적은 국정 상황에 따라 상이했다.
[변천]
조선 시대 조선통신사라는 용어는 1413년(태종 13) 처음 등장하며, 파견은 1428년(세종 10) 정사 박서생(朴瑞生) 사절단의 파견이 시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과의 사절단 왕래가 끊겼으나 선조 연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이 이루어진다.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에도 막부가 대마도 번(番)을 통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여러 차례 요청하자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고 통신사 파견을 재개 하였다.
인조반정 후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새로운 외교 관계 구축 즉, 청 중심 책봉 체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상호 연대 강화를 모색했다. 이러한 국제 환경 변화 속에서 통신사는 정례화되었고 대마도와 실질적인 통교를 위하여 문위행(問慰行), 팔송사(八送使), 차왜(差倭)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대륙 정세가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은 의례적인 형식이 짙어졌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외교적인 의미가 상실되어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은 끝이 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통신사 파견의 주 업무는 조선 국왕이 막부 장군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국서(國書)와 별폭(別幅)을 전달하고 막부 장군의 국서와 별폭을 받아서 조선 국왕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였을 뿐 당시 상황에 따라 다른 업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공식적인 업무 외 통신사는 양국 문화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래서 사절단 구성 시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난 문재(文才)들을 반드시 선발하여 편성하였다. 이들은 방일 중 일본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여러 계층과 문화적 접촉을 통해서 많은 서화·시문·글씨를 남겼다.
1636년(인조 14) 김세겸의 『해차록(海差錄)』에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서원(書員)은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유품들을 병풍·회권·판화 등으로 제작하여 유행했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현황]
조선통신사 파견 절차는 먼저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 장군의 승습(承襲)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와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조선에 알린다.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 관리 3인 이하로 정사·부사·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한다.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오사카까지는 해로로, 도쿄까지는 육로로 이동하는 긴 노정이었다. 국내 노정 지역은 각 군현의 경제적 부담 완화를 위해 일반적으로 하행로(下行路)와 상행로(上行路)를 서로 달리하려 했다. 김성일의 『해차록(海差錄)』에 의하면 하행로 노선은 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승선-충주-안보-문경-유곡-용궁-예천-풍산-안동-일직-의성-청로-의흥-신녕-영천-모량-경주-구어-울산-용당-동래를 거쳤다.
통신사 사행원(使行員) 집결지는 대체로 1차 서울, 2차 영천, 최종 부산 등 3곳이었다. 2차 집결지였던 영천은 주로 영천 인근에 거주하는 사행원들이 집결하는 고을로 사행 접대와 필요 물자를 제공하였다. 특히 영천에서는 통신사행을 위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전별연과 마상재 공연이 조양각에서 펼쳐졌다. 전별연과 마상재 관람 장소인 조양각에는 고려 말 일본 사행을 떠났던 영천 출신 정몽주의 시판(詩板)이 게시되어 있다. 그러한 전통에 따라 사행원들은 차운시(次韻詩)를 짓는 게 당연한 순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영천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지역의 문인들이 사행원들을 방문하여 교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과 경상좌수사영에서 준비한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척, 짐 싣는 복선(卜船) 3척 등 모두 6척으로 출항하였다.
일본 노정 지역은 대마도를 시작으로 아이노시마-시모노세키-시모카마가리-도모노우라-우시마도-오사카-교토-히코네-오가키-나고야-아리이-시즈오카-하코네-도쿄를 경유하였다.
원중거(元重擧)의 『승차록(乘差錄)』의 귀환하는 상행로 노선은 부산-동래-송당-울산-구어-경주-아화-영천-신녕-의흥-의성-일직-안동-옹천-영주-풍기-단양-수산-충주-가흥-안평-여읍-양읍-봉안-평구-서울로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통신사는 일본과의 우호 관계 유지라는 정치·외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를 통해서 일본 사회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끼친 문화사적 의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