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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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倉邱洞 |
이칭/별칭 | 창고,창뚜들,진청마당,개웅굴샘,옥터,객사터,성문터,형방터,호방터,창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천문로[창구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재우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3월 1일 -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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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37년 7월 1일 -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에서 영천군 영천읍 창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1년 7월 1일 - 영천군 영천읍 창구동에서 영천시 창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1월 1일 - 영천시·영천군 통합, 도농 복합 형태의 영천시 창구동으로 개편 |
행정구역 | 창구동 - 경상북도 영천시 중앙동 |
성격 | 법정동 |
면적 | 0.23㎢ |
가구수 | 325가구 |
인구[남, 여] | 703명[남 355명, 여 348명]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창구동(倉邱洞)은 창고가 있었다는 데 연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곳에는 관에서 관장하던 창고가 있었으므로 창고(倉庫)·창뚜들로 일컫다가 창구동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창구동은 영천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한 마을로, 진청마당·개웅굴샘·옥터·객사터·성문터·형방터·호방터 등 속칭이 많은 지역이었다.
창구동은 조선 후기 영천군 내서면(內西面)에 속한 지역으로, 창뚜들 또는 창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관덕동(官德洞)을 통합하여 창구동이 되어 영천면에 편입되었다.
1937년 7월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면서 영천읍 창구동이 되었다가 1981년 7월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어 영천시 창구동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영천시 일원과 영천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 복합 형태의 영천시가 되면서 영천시 창구동이 되었다.
[자연 환경]
창구동은 남쪽의 금호강(琴湖江) 유역에 있으면서 예부터 영천 지역의 가장 중심부를 이룬 동네다. 창구동의 북쪽은 마현산(馬峴山) 주봉이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남천(南川)이 흐르고 있다. 동쪽은 문내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교촌동과 과전동을 접하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옛날 남문과 북문이 모두 소재한 지역이다.
[현황]
창구동의 동쪽은 문내동(門內洞), 서쪽은 교촌동(校村洞) 및 과전동(果田洞)과 접해 있으며, 영천시의 유서 깊은 장소들이 많은 곳이다. 창구동의 면적은 0.23㎢이며, 인구는 2011년 말 현재 325가구, 703명으로, 남자가 355명, 여자가 348명이다.
창구동의 문화재로는 서세루(瑞世樓)로도 불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조양각(朝陽閣)이 있다. 조양각은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 건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742년(영조 18)에 복원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기타 유적으로는 객사 터, 북문 터, 장방청(將房廳) 터, 청량당(淸凉堂) 터,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 와계정(臥溪亭) 등이 있다. 산남의진비는 정환직(鄭煥直)이 한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으로 활약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립하였다. 기념물로는 영천지구 전승비가 있는데,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8년에 건립하였으며 비의 높이는 6.4m이다.
창구동의 공공 기관으로는 영천 문화원이 있으며, 휴식처로는 규모 20만여㎢의 마현산 공원이 있고, 체육 시설로는 금호강(琴湖江) 고수부지 게이트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