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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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湖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신화로[귀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재우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3월 1일 - 영천군 화산면 귀호동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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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86년 4월 1일 - 영천군 화산면 귀호동에서 영천군 화남면 귀호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8년 5월 3일 - 영천군 화남면 귀호동에서 영천군 화남면 귀호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1월 1일 - 영천군 화남면 귀호리에서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로 개편 |
행정구역 | 귀호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8.28㎢ |
가구수 | 121가구 |
인구[남여] | 244명[남 125명, 여 119명]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귀호리(龜糊里)는 1914년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자연 마을인 귀계(龜溪)와 호암(湖岩)을 병합하여 만든 명칭이다. 호암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형성 및 변천]
귀호리의 ‘평지마’는 귀일 북쪽에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평지(平地)이어서 ‘평지마’라 했고, 안귀일[內龜日]은 귀일에서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자리 잡아 귀일 안쪽에 있으므로 안귀일 또는 내귀(內龜)라 불리어졌다 하며, 임진왜란 전에 추계 추씨(秋溪秋氏)가 개척하였다. 다라골[多羅谷]은 약 520년 전 청주 양씨(淸州楊氏)가 들어와서 다래나무를 베어 내고 샘을 파고 살았다 하며, 청주 양씨의 동족 집단 부락이다. 고부터[古阜基·高敷地]·고부[古阜·高敷]는 평지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언덕에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처음 집을 지었다 해서 ‘고부터’라 불렀다고 한다. 새마·새마실·새마을은 조선 말에 생긴 마을로 청주 양씨가 주로 살고 있다. 새못터 혹은 동재못터는 창녕 조씨 중시조인 이조 참판 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을 모신 회계 서원(晦溪書院) 동재·서재 인근에 생긴 마을이다.
귀호리는 원래는 신녕군 대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천군 화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6년 영천군 화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자로 영천시·영천군이 통합해 영천시 화남면에 편입되었다.
[자연 환경]
귀호리는 화남면사무소 서부 지역에 형성된 산지 지역으로, 서쪽으로 화산면 화산리에 연접한다. 화산(華山)에서 이어지는 산지는 동남으로 뻗어 앞뒤 산을 이루었으며, 저수지 오천지가 있다.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계곡은 ‘귀일안못’에서 발하여 농업 용수로 이용되고, 북쪽 방향으로는 크게 높지는 않지만 각 산정이 뾰족하게 보인다.
[현황]
귀호리는 귀호1리와 귀호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구일(龜逸)[귀일·귀계]·우목골[牛牧谷]·새못터·평지마·안귀일·다라골[多羅谷]·고부터[고부]·새마[새마실·새마을] 등이 있다. 귀호리의 면적은 8.28㎢이며, 인구는 2012년 7월 말 현재 121가구, 244명으로, 남자가 125명, 여자가 119명이다. 고속도로가 인접하여 최근 귀호리에 공장이 진출함에 따라 외부 남자 노동력의 유입으로 성비에서 남자가 더 많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철종 때 조극승(曺克承)·조규승(曺逵承) 두 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형은 공조 참의(工曹參議), 아우는 찰방(察訪) 벼슬을 역임했다. 형제의 우애는 근세에 보기 드문 일이며 형의 정자는 귀애정(龜厓亭), 동생의 재사(齋舍)는 성재(省齋)이다. 귀애정은 1997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