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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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川里 |
이칭/별칭 | 대리,한내,천생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천문로[대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재우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3월 1일 - 영천군 지곡면 대천동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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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34년 4월 1일 - 영천군 지곡면 대천동에서 영천군 화북면 대천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6년 4월 1일 - 영천군 화북면 대천동에서 영천군 화남면 대천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8년 5월 3일 - 영천군 화남면 대천동에서 영천군 화남면 대천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1월 1일 - 영천군 화남면 대천리에서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로 개편 |
행정구역 | 대천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2.5㎢ |
가구수 | 168가구 |
인구[남여] | 355명[남 173명, 여 182명]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대천리(大川里)는 초기에 정씨(丁氏) 조상이 중국 대천리에서 왔기 때문에 ‘대리(大里)’라 하였고, 또한 물이 맑고 차가웠기에 한내·생천(生川)이라고도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리의 ‘대(大)’자와 생천의 ‘천(川)’을 따서 대천리라 칭하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대리는 정광성(丁光成)이란 선비가 16세기에 처음 개척하여 나주 정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나주 정씨(羅州丁氏)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천2리 생천은 창녕 성씨의 세거지이다.
대천리는 1914년에 영천군 지곡면(知谷面)에 속하였고, 1934년 4월 1일 화북면이 되었다가 1986년 4월 1일 영천군 화남면에 속하였다. 1995년 1월 1일자로 영천시·영천군이 통합해 영천시 화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 환경]
대천리는 보현산(普賢山)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능선이 넓은 언덕을 이루고 화산(華山)에서 뻗은 능선이 동남쪽으로 내려왔다. 이 두 능선 사이에 넓은 들이 생겼다.
고현천이 대천리 마을 아래 남쪽으로 흐르고 하천 맞은편에 길이 약 1㎞에 이르는 아름다운 하식애가 발달하였다. 그 아래의 하천에는 낮에도 어두침침한 소(沼)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양강소이다. 예로부터 양강소는 경치가 좋아 음력 5월 5일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놀던 곳이다.
[현황]
대천리의 면적은 2.5㎢이며, 인구는 2012년 7월 말 현재 168가구, 355명으로, 남자가 173명, 여자가 182명이다. 자연 마을로는 강당·대리(待里)·생천·큰가솔 등이 있다. 고속 도로 개설 등 교통 입지 여건이 좋아져 경제적 분위기가 활성화되고 있으며 신용 협동 조합과 제약 회사가 입지하고 있다. 대천1리에는 서원과 전적지 등의 사적지가 남아 있다.
대천 서원(大川書院)은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성송국과 판서를 지낸 성기, 성덕룡을 봉향하고 있으며, 학천 서당(鶴川書堂)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하여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훈(二等勳)을 받은 이온수(李薀秀) 장군의 서원이었으나 흥선 대원군 때 훼철되어 서당이 되었다. 해은정(海隱亭)은 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정응생(丁應生)의 정자이다.
마을 동쪽에 노방(老坊)이 있는데, 이곳은 6·25 전쟁 때 인민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자리로서 14일간 뒷산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으며, 8사단의 1개 대대가 포위당했던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