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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35
한자 佛敎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이동철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전파된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

[개설]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이를 세상에 펼치는 종교이다. 어느 나라의 불교든 사실은 석가모니의 학설을 기준으로 삼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소승 불교(小乘佛敎)와 대승 불교(大乘佛敎)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 전해진 불교는 일반적으로 대승 불교에 속한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65년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위시한 번역승의 활동을 통해 불교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고 확산되는 시기였다. 이후 수(隋)와 당(唐)을 거치면서 불교는 천태종·화엄종·정토종·선종 등 종파 불교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중국을 거쳐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그리고 신라는 가장 늦은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서울의 명칭이 바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신라 혹은 서라벌, 그리고 서울은 인도의 도시 슈라와스띠(Sravasti), 즉 불경에서 ‘사위성(舍衛城)’을 번역한 음차어이다. ‘슈라와스띠’가 ‘서벌’ 또는 ‘서라벌’이 되고, 이것이 또 ‘서울’이 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불교의 영향이 깊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의 불교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졌다. 역대 왕들은 불교를 이용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국력을 강하게 하는 데 목표를 두었으며, 이로써 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신라 당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양립했다고 하지만, 신라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특히 선종의 전통이 강하였다. 이후 고려 시기 불교는 크게 융성하여 결국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상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 숭유척불의 정책에 의해 불교계에서는 유교나 불교나 비슷한 가르침을 설파한 것이라 주장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국난에 처했을 때는 호국 불교의 위세를 떨치면서 점차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깊은 산 깊은 골에서 수도에 전념하면서 민중들과 함께하는 대덕(大德)들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 시기의 호국 불교와 민중 불교로 이어지고, 현재에는 전도를 통해 많은 신도들이 형성되면서 그 세가 크게 확충되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신도 수가 많은 종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완전한 정신적 자각을 추구하는 가르침이자 종교라는 원의를 잃지 않았다. 2000년을 전후로 하여 원래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초전 불교 운동이 일어나, 빨리어·산스크리트어로 석가모니의 원래 말을 돌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신라에 불교가 유입되는 것은 눌지왕아도(阿道)에 의해서이지만, 정식으로 불교가 승인된 것은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흥법(興法)을 살펴보면 ‘아도’가 신라 불교의 터를 닦은 것은 맞지만, 그 연대가 263년까지 올라간다고 하였다. 하지만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스스로 평하기를, 고구려에 온 ‘아두’가 이후 다시 신라로 온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신라에서 불교는 꽃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의 과정은 명확하지가 않다.

[내용]

신라의 수도 경주에 인접한 영천 지역의 불교는 『영양지(永陽誌)』영지사가 옛날 웅정사(熊井寺)로 개창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이른 예이다. 그러나 건립 시기를 오봉(五鳳) 원년이라 하였는데, 이는 기원전 57년으로 믿기 어렵다. 실제 영천의 불교는 816년(신라 헌덕왕 8) 은해사(銀海寺)에서 출발하였고, 은해사 주변 산내 암자들을 통해 영천의 불교가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거조암(居祖庵)은해사보다 이른 시기인 효성왕 2년(738)에 창건되었다. 이들 사찰의 창건자는 원효(元曉)·자장(慈藏)·의상(義湘), 그리고 심지왕사(心地王師) 등이다.

이후 816년(헌덕왕 8) 은해사기기암이 창건되었고, 834년(흥덕왕 9) 상용암과 중암암, 869년(경문왕 9)에 백흥암이 창건되었으며, 이 밖에 운부암·서운암·백운암·충효암·수도사·죽림사·묘각사·선흥사·삼귀암·불굴암·봉림암·저수암·정각사·법화사 등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려 시대에는 정종보현산(普賢山)거동사(巨洞寺)가 창건되었고, 문종혼수국사(混修國師)진불암(眞佛庵)을, 인종은해사 백련암(白蓮庵)이 창건되는 등 은해사 주변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고려 말에서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영천은 정몽주(鄭夢周)의 영향으로 유교적 성향이 특히 강해서 불교는 약화된 듯하며, 조선 시대 사찰에 관한 기록도 미약해진다.

영천에 소재한 전통 사찰로는 영천포교당·죽림사·신흥사·영지사·신녕포교당·부귀사·수도사·진불암·한광사·거동사·묘각사·은해사·봉림사의 13개 사찰이 남아 있는데, 포교당이 두 곳, 법왕종 사찰이 1개소, 나머지는 모두 조계종에 속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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