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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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과학·기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조 |
소재지 | 최무선 생가터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구 창산초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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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최무선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마을 |
소재지 | 최무선 장군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
[개설]
1995년 4월 문화체육부에서 과학의 달 문화 인물로서 ‘과학자 최무선’이 선정되자, 최무선(崔茂宣) 장군의 태생지인 영천에서는 영천 최씨 문중과 지역 문화예술계·교육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가운데 대대적인 추모 기념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95년 2월 15일에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1995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종합적인 기념 행사를 실시한다는 목표로 영천시청을 중심으로 최무선 장군의 후손과 문화계 인사 등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 추진위원 21명이 경향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최무선 장군과 관련된 자료 발굴에 착수하였다.
[문화 인물 요약집 발간]
1995년 당시 최무선 장군의 생몰 연대마저도 불확실하였던 상황에서 최무선 장군의 일생을 더듬는 작업은 고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문화체육부에서는 문화 인물 선정을 기념하는 『문화 인물 요약집』 발간을 계획하였고, 영천에서는 최무선 장군의 출생 연도부터 찾고자 했는데 족보 등을 찾아서 1326년경 출생, 1395년 사망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이때 밝혀지게 되었다.
이 요약집이 나오기 전에는 대부분의 위인전기집에는 생몰 연대를 ‘?~?’으로 표기하였는데 최무선 장군의 문화 인물 선양 사업 이후부터 생몰 연대가 제대로 쓰여지고 있다.
1995년 4월 21일 당시 최무선 장군이 태어난 날이 확인되지 않아 기념 사업 일정은 과학의 날인 4월 21일을 지정하여 4월 문화 인물 기념식 겸 최무선 장군 추모제를 추모비 제막식으로 병행하여 거행하였고, 이와 함께 최무선 장군 기념 과학 경연 대회, 학술 세미나, 기념 강연회, 실기 『최무선전』 발간, 생가 유허비 설치 등이 영천시 일원에서 실시되었다.
당초 국비와 시비 각각 200만원이라는 보잘것없는 예산으로 시작한 사업이 후손들의 성금과 문예진흥기금 등이 모여 사업비가 무려 5,000여 만원으로 증액되었다. 최무선 장군이 서거한 지 600년 만에 고향인 영천에서 장군의 추모 행사를 마치던 4월 21일 오후 2시에는 지난 1개월 동안 심한 봄가뭄에 타들어 가던 대지에 엄청난 양의 빗줄기가 내려 봄가뭄이 해갈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도 영천시 교촌동 야트막한 동산에 세워진 최무선 장군의 추모비 건립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곤 한다.
구국의 혼을 불사른 최무선 장군이 구천에 떠돌다 60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감읍한, 장군의 ‘눈물’은 아니었을까?
[마단(麻丹)마을에 최무선과학관으로 부활한 장군의 과학 정신]
1995년 3월, 영천 지역 출신 유학자이자 후손인 고 최석기 선생이 최무선 장군의 전기를 모은 『최무선전』을 영천 최씨 문중을 통해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에 기증하였다. 이를 향토 서예가이자 원로 교육자인 고 춘암 노재환 선생이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최석기 선생으로부터 금호읍 원기리 마을 입구에 최무선 장군의 생가터가 있다고 들은 이야기를 떠올림으로써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에서 생가터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부터 영천시를 비롯하여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 금호읍민들은 장군의 생가를 복원하자는 데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진포대첩(鎭浦大捷) 및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 등의 해전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후대의 화약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장군을 기념하는 최무선과학관이 2012년 4월 20일 개관하였다. 이 과학관은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또한 영천시의 관광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최무선 장군으로 시작되는 창의적 과학 정신이 명실상부하게 이곳 마단마을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한편, 제2차 사업을 추진하는 장기 계획에는 생가 복원도 포함되어 있는데, 건물의 외형은 세계 해전사상 최초로 함선에 화포를 거치하여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의 함선 이미지를 담게 될 것이다.
최무선과학관은 2007년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지방 테마 과학관 사업으로 선정되어 국비를 포함하여 약 90억원의 예산으로 구 창산초등학교 부지[41,481㎡]를 매입,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립되었다. 과학관 내부에는 신기전(神機箭)과 같은 화포와 관련된 복제 유물, 영상물, 전시물, 체험 시설 등이 있고, 외부에는 군에서 물려받은 항공기 2대를 비롯하여 탱크 3대, 수륙장갑차 2대의 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영천이 낳은 과학자 최무선의 생애]
최무선은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 최한(崔漢)의 6세손으로, 1326년(충숙왕 13) 경에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麻丹)마을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최무선은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소년 시절에 즐겨 읽은 책은 과학과 기술에 관계되는 각종 방서(方書)였고, 남다른 생각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최무선은 한문뿐만 아니라 중국말에도 능통하였고, 군사와 병기 등에도 많은 열의와 취미를 가져 당시 유학 또는 불교에 힘쓰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장성하여 벼슬자리에 나가서도 당시에 고려를 흉흉하게 만드는 왜구의 노략질을 뿌리째 뽑아 버리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당시 왜구는 시일을 정해 놓고 일시에 몰려드는 것이 아니고, 산발적으로 갑자기 각처에서 날뛰는 무리였으므로 비록 해안에 많은 군사를 배치해 둔다 해도 이를 쳐부수기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왜구 격퇴의 묘책을 짜내기에 골몰하던 공의 뇌리에 언뜻 떠오른 것은 화약의 사용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염초(焰硝)로 인마(人馬)를 살상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었고, 고려에서도 그 중 얼마를 얻어와 간단한 병기와 화희(火戱)[불꽃놀이]에 쓰고 있었다.
최무선 장군은 이 화약을 많이 만들어 배에 싣고 바다에 나아가 왜구가 우리 땅에 상륙하기 전에 배들을 불태워 섬멸하는 것이야말로 왜구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묘안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약의 제조법은 중국에서 비밀에 부쳐 외국에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최무선은 주야로 화약의 제조법을 연구하였으나 무엇보다도 진토(塵土)[마루 밑 같은 곳에 많은 먼지가 앉은 흙] 중에서 염초를 구워 내는 기술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알아내기 위하여 염초 굽는 기술자를 백방으로 찾았다. 당시 고려의 수도 개성의 출입구인 예성강(禮成江)에는 중국 상선이 가끔 왕래했는데, 최무선은 중국 배가 닿기만 하면 빠짐없이 그들과 접촉하여 그 속에 염초 기술자가 없지 않나 살펴보곤 했다.
마침내 1376년(우왕 2)경, 최무선 장군은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碧瀾渡)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나 그에게서 염초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최무선은 수 차례의 실험을 거쳐 화약의 기본 성분인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숙지하여 반묘와 탄소를 합리적으로 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 유황 10%, 목탄 15%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최무선 장군은 곧 이 사실을 도당(都堂)에 보고하고, 아울러 화약을 대량으로 제조하기 위하여 화통도감(火㷁都監) 설치를 건의하였지만, 당시 과학기술에 무지한 위정자들은 비웃고, 심지어 국가를 기만하는 자라고 비방까지 했다.
그러나 최무선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몇 차례의 상주(上奏) 끝에 마침내 1377년 10월에 화통도감 설립을 명받았고, 최무선 장군에게는 이의 운영권을 맡을 제조직(提調職)이 주어졌다. 최무선은 화통(火㷁)·화전(火箭)·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 등 각종 화약 병기를 만들어 성대한 시방식(試放式)을 거행하였는데, 그 동안 반대했던 이들도 병기의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약 병기를 갖춘 최무선 장군은 다시 중국인으로 전함(戰艦) 제조에 능한 자를 모아 많은 배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왜구의 침범을 일격에 분쇄할 준비가 다 갖춰졌다. 왜구들이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무찌를 계획으로 전함 건조에도 이처럼 힘썼던 것이다.
화통도감 설치 후 3년 만인 1380년(우왕 6) 8월, 손시제(孫時制)를 괴수로 하는 왜구선 500여 척이 전라·충청 양도 해안을 노략질하려고 먼저 진포(鎭浦)[지금의 군산, 금강의 어귀]에 닻을 내렸다. 왜구들은 배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묶어 마치 해상의 대요새(大要塞)와 같이 만들었다.
이에 고려는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都元帥), 나세(羅世)를 상원수(上元帥), 최무선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고, 이때야말로 화약을 실용할 기회라 하여 백여 척의 배에 화약 병기를 가득 싣고 나가 싸우게 하였다. 진포에 이른 최무선은 오십 평생 쌓이고 쌓였던 염원을 마음속으로 되뇌이면서 적선을 향해 손수 만든 화포와 화통에 불을 질렀다. 하늘을 치솟는 붉은 연기와 함께 적선은 불붙기 시작하고, 큰 밧줄로 튼튼히 묶인 배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육상 각지에서 노략질하던 잔당들도 1380년 9월, 지리산 중턱의 운봉(雲峰)에서 이성계(李成桂) 장군 진영에 의하여 섬멸되고 1383년(우왕 9) 남해의 관음포(觀音浦) 근방에 침입해 온 왜구 2,400여명도 최무선 장군과 정지(鄭地) 장군의 화약병기 공격으로 대파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이성계가 집권하자, 화약이 역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1389년(창왕 1)에 화통도감을 폐지하고 말았다. 상심한 최무선 장군은 『화포섬적도(火砲殲賊圖)』와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및 『화포법(火砲法)』 등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10세 안팎의 아들에게 물려줄 것을 유언하고 일생을 마쳤다.
[최무선 장군의 빛나는 업적]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무기 발달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는데,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 발사기류와 화전(火箭)·주화(走火)·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 등 피발사체 또는 자체폭발력을 지닌 로켓 화기류가 있다.
1380년 진포해전에서 최무선 장군은 전함에 화차(火車)를 거치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원래 최무선이 만들었다는 화약무기들의 종류 가운데에 화차는 들어 있지 않다. 다만 당시 대학자였던 권근(權近)[1352~1409년)이 진포대첩을 축하하는 시문에 화차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고 있다. 내용 중에서 화차 부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포에서 왜군의 배를 격파한 최무선 원수를 축하하며
- 최공은 처음으로 화포를 만들었음 -
님의 재략이 때 맞추어 태어나니
30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도다
바람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火車)는 우레소리를 울리며 진(陣)을 독촉하네
주유(周瑜)가 갈대 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韓信)이 배다리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 보냐.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번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 후에까지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도다
종묘사직은 경사롭고 나라는 안정을 찾았으니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는도다.
(『양촌집(陽村集)』 권 4,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
이 시문은 진포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한 최무선 부원수를 축하하는 내용이고, 진포해전이 순수한 해전이기에 화차에 대한 부분 역시 해전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화기로 무장된 고려의 전함이 대 왜구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1380(우왕 6)에 벌어진 진포해전과 1383년에 벌어진 남해의 관음포해전이었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장군이 이룬 업적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역사적 평가는 동시대의 평가를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다. 권근은 최무선보다 20여 년 나이가 적기는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권근은 최무선의 업적을 아주 크게 평가하고 그 업적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화약을 처음 개발하여 이를 무기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아예 이 시의 제목에 부제를 달아 설명해 놓고 있다.
둘째로 권근이 평가한 최무선의 공로는 그가 실제로 배를 타고 왜적과 싸워 이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30년 동안의 말썽을 하루에 근절시켰다는 점이다. 실제 고려 말에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의 일이었다. 거의 해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괴롭히던 왜구는 드디어 충청과 경기 지역까지 침노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권근은 바로 이렇게 날로 심해지는 왜구를 최무선이 하루아침에 싹 쓸어 버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쓴 것은 꽤 과장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 후에도 몇 차례의 중요한 싸움을 거쳐 왜구는 소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성계의 운봉 싸움은 더 잘 알려진 왜구 소탕전이라 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최무선이 진포대첩에서 화차를 사용했다는 대목이다. 화차는 원래 최무선이 만들었다는 화약무기들의 종류 가운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화차는 장군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발명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최무선의 화약 발명과 화약무기 개발은 그 후 조선 왕조의 중요한 국방 기술의 전통으로 남게 된다. 그 결과 고려 말 왜구 소탕에 효험을 보여 준 화약무기는 임진왜란 때에도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임진왜란 때에는 이미 일본은 서양 사람들이 개발해 전해 준 소형 화약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으로 가지고 침략해 왔다. 따라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싸우던 조선군이 육상 싸움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싸움에서는 그 동안 일본보다는 조선이 화포 기술은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봉건 시대가 계속되던 서양에서는 중국에서 화약이 전해지자 즉각 대포가 제조되었고, 소형의 화포 즉 조총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1543년(중종 38) 가고시마[鹿兒島]에 표류해 온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 전국에서 일본도(日本刀)를 만들던 금속 기술이 당장 전용되어 그런대로 훌륭한 조총이 제작, 보급되어 삽시간에 수십만 자루가 퍼졌다. 이것이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갖고 들어와 조선군을 깜짝 놀라게 만든 조총 또는 화승총(火繩銃)이었다. 심지를 달아 한 번 쏠 때마다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는 구식이었지만, 활과 화살만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유리한 점도 많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평화로운 나라였던 조선 왕조에서는 고려 말 왜구 이래 그리 큰 노력을 화약무기 개발에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화약무기 개발은 오히려 억제되는 측면이 강했는데, 그 까닭은 그런 무기의 보급은 결국 군사적 야심가들을 자극할 수도 있고, 게다가 왜구에게 화약 기술이 전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는 아직도 중화기에서는 일본을 압도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경화기라 할 수 있는 화승총을 갖지 못한 조선군이었지만, 대포에서는 최무선 장군의 공이 아직 그 영향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해전에서 일본군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도 있었고, 이장손(李長孫)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나 변이중(邊以中)의 화차 등 화약무기 개발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미 화차나 비격진천뢰는 거의 최무선 때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헌상의 같은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장손의 비격전천뢰나 변이중의 화차 등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그것보다 무언가 많이 나아진 모델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최무선은 우리들이 지금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기술 자립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과학 기술의 무한 경쟁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들에게 최무선의 노력은 깊이 되새기고 본받아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최무선의 과학 정신이 후세에 남긴 영향]
최무선 장군의 가장 큰 업적은 진포 앞바다의 해전에서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완파했고, 관음포에서는 바다에서 함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을 치렀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00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베네치아·제노바·에스파냐의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Lepanto) 해전이다. 학자들은 최무선 장군의 화약 발명에 이은 군함에의 화포 도입이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이성계가 최무선 함대의 진포대첩 대승 후 패잔병들을 운봉 황산(荒山)에서 궤멸시키지 않았다면 고려인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무선의 해전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 전환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왜구를 격퇴하기는커녕 패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 화약의 자체 생산 성공은 군사 기술상 획기적인 위업이었다. 우리나라의 화약병기의 제조는 중국에는 뒤졌으나 일본이나 여진족보다는 170년이나 앞선 것으로서, 조선 왕조 중엽에 이르기까지 무기 체계상 동양의 선진국으로 자처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최무선 장군은 고려 말에 한반도 연안은 물론 내륙에까지 준동했던 왜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화약임을 인식하고 이의 개발에 착수하여 성공하였다. 또한 그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병기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화약의 독자적 발명에 이어 이를 군사용으로 이용하고 응용 발전시킴에 있어서 대단히 신속했던 것이다. 고려는 다양한 화기를 제작하고, 또한 화포의 발사에 적합한 전함을 건조함과 동시에 화포를 함재포(艦載砲)로 이용하였다. 화포를 전함에 탑재하여 함포로 활용함은 해전사상 세계 최초로 기념될 역사적 의의가 있다.
최무선으로부터 시작된 화약의 비법은 그의 아들 최해산으로 계승, 발전하여 조선의 화약병기의 기술적 수준을 높였다. 조선의 화약병기는 남방 왜구와 북방 여진을 제압하는 최상의 이기(利器)였다. 고려 말의 국난이 왜구였기에 화기의 제조와 전술적 운용에 대한 관심은 해상용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국방의 관심은 여진으로, 이에 대응할 육상용 화기 개량과 이의 전술 개발에 노력하였다.
화약병기가 지상전에서 사용됨으로써 전술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는 방어 전술이 중심이었으나 공격 전술 이론이 개발되었으며, 대규모 부대 편성과 전술 체계에서 소부대 편성과 전술로 전환되었다. 화기가 개인 무기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지휘와 조직에도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이 취한 화약병기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금비책(禁祕策)은 장기적인 면에서는 역기능적인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왜와 여진에 대한 자부심은 일방적으로 경제적인 혜택의 부여와 화희(火戱) 행사와 같은 위락적인 군사 외교의 수단으로 전락되게 되었다. 또한 금비책의 결과는 현실적으로 개발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소홀하게 되고, 전술적 사용에서 중앙식 통제형은 신식 무기의 전술적 활용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결과가 되었다.
1995년 4월, 로켓 박사로 알려진 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蔡連錫) 박사가 최무선장군 기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천을 방문하면서 로켓을 연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중학생 때 배운 최무선 장군의 ‘주화(走火)’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주화는 ‘달리는 불’의 뜻으로, 지금의 로켓과 같은 얼개 동작 원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로켓인 셈이다. 주화가 이 땅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최무선 장군이 화통도감에서 활약한 시기를 1377년부터 화통도감이 문을 닫은 1387년까지로 본다면, 이 사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인 주화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채연석 박사는 장군이 기존에 있던 로켓화기인 화전(火箭)을 보다 개량하고 새로운 개념의 ‘주화’를 발명했다고 추정한다.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단 다음 화살에 활을 재어 날리는 무기이지만 주화는 화전과는 달리 화살의 화약통에 불을 달아 자체 추진력으로 불화살이 날아가게 한 무기이다. 화전과 주화는 추진 화약의 작용에 의한 분사 추진식 화살로서 추진 원리는 지금의 로켓과 같지만, 적군에게 주는 파괴력은 주화가 화전보다 월등하다.
주화는 1448년(세종 30) 금촉주화에서 세주화, 금촉소주화, 소·중·대주화를 거쳐 소·중·대 신기전(神機箭)으로 불리며 화차에서 발사할 수 있는 자동화 무기로 변한다.
한편, 보현산천문대 연구원들이 1.8M 광학망원경을 이용하여 120여 개의 소행성을 발견하였는데, 2000년부터 찾아낸 소행성 중에서 국제천문연구원으로부터 먼저 ‘보현산별’로 명칭을 받고, 이어서 우리나라 과학자의 이름을 부여하자는 방침에 따라 두 번째로 명명한 별을 ‘최무선별’로 이름지었다. 지난 600년 동안 잊혀져 있었던 최무선 장군은 이렇듯 별로 환생하여 영천의 ‘보현산별’과 함께 광활한 우주 속에서 엄연한 소행성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지난 2009년 9월 대전에서 고려 시대의 로켓무기 주화와 화약무기 10종이 국내 최초로 3차원 디지털 기술로 복원되었는데, 화통도감과 최무선 장군을 중심으로 개발된 그 당시 최고(最古)의 화약무기류 및 세계 최초의 화기 전문 부대 화통방사군(火熥放射軍)에 대한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는 로켓 전문가인 채연석 박사 등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 아래 KAIST CT대학원 디지털 복원팀 등이 참가해서 학술적 가치는 물론, 창작 소재를 활용한 유·무형적 산업적 가치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하여 개발된 결과물은 2D, 3D그래픽, 발사 실험 동영상, 팩션 시나리오 등이 있는데, 대전문화산업진흥원에서 제작 중인 최무선의 로켓무기 주화가 현대의 나로호 로켓으로 변화되어 우주로 날아간다는 내용의 ‘진포대첩 3D애니메이션’ 작품에 KAIST CT대학원의 스토리텔링 기술이 접목되어 제작되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항공 우주 기술이 600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선조의 지혜라는 긍지로 현재 영천시 최무선과학관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제 3차 발사를 앞두고 있는 나로호를 최무선호로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우주센터가 있는 지명을 딴 별 의미 없는 이름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로켓 발명자의 이름을 붙여서 명명해 홍보한다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되리라 생각된다. 해군에서도 최무선호 잠수함이 활약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주로켓에서도 ‘최무선호’가 우주를 종횡무진한다면 과학 한국의 새 역사가 더욱 빛날 것이고, 과학자들의 사기는 물론 후손들과 2세 교육에도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무선 장군의 고향인 영천에서는 화약과 화포 발명에 대한 위업을 기리고자 매년 4월 과학의 달에는 후손들인 영천 최씨 대종회와 지역의 문화·예술단체, 시민들이 모여 추모 제례를 올리고 있으며, 아울러 최무선의 과학 정신을 널리 기리고자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최무선과학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우주 강국 소망의 재점화를 계기로 우주에 언젠가는 소행성 ‘최무선별’과 함께 인공위성에도 최무선의 이름이 붙여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