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07 |
---|---|
한자 | 永川-水利施設-最古-水利碑菁堤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재수 |
관련 유적 | 영천 청제비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7-1 |
---|
[개설]
경상북도 영천시는 기후적으로 일조량은 많은 반면에 강수량은 적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농경을 위한 수리(水利) 시설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1,500여 개의 저수지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수리 시설의 모습을 밝혀 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 영천시 도남동 청못 밑에 세워진 청제비(菁堤碑)가 있다. 영천시는 전국 최대량의 저수지가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고, 또 최고(最古)의 수리비(水利碑)가 있는 역사적인 지역이다.
영천의 청제비는 신라 시대 수리 시설의 실태를 파악하고, 통일 신라 시대의 중앙 집권 체제와 역역(力役) 동원과 관련하여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주남들 농사의 기반, 주남보와 새보]
요즈음도 영천은 농업이 중심인 사회이다, 그것을 웅변이라도 해 주듯이 영천 지역에는 수리 시설이라 할 제언(堤堰)[농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이 유달리 많은 것 같다.
현재의 영천 지역에 많은 저수지들은 물론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식량 수탈을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강요에 의하여 만든 저수지가 많은 탓도 있지만, 조선 시대의 읍지(邑誌) 등 지역 자료를 보아도 조선 시대에도 제언(堤堰)이 많은 것을 일별해도 알 수 있다. 영천에 이렇게 논농사를 위한 제언이 많은 것은 일찍이 골화소국(骨火小國)[통일신라 이전 영천의 옛 지명]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오늘날의 주남들과 완산보에서부터 그 맥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남들은 복재(復齋) 정담(鄭湛)의 『임란영천복성일기(壬亂永川復城日記)』에 보면 ‘추평(楸坪)’이라 기록되어 있고,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병와연보(甁窩年譜)』에는 ‘주남평(周南坪)’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천향교지(永川鄕校誌)』에는 주남평(周南坪)을 ‘주평(朱坪)’ 또는 ‘주남평(朱南坪)’이라 기록하고 있다. 민간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주남평(朱南坪)’이라 쓰게 된 것은 부흥동(富興洞)[현재 영천시 금로2동]에 ‘주씨(朱氏)’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기 때문이라 하나, 실상은 윤씨(尹氏)였다는 증언도 있다.
1662년(현종 3)에 세워진 주남평유공비(周南坪有功碑)에 ‘주남평(周南坪)’이라 기록되어 있으므로, 원래 ‘주남(周南)’이던 것이 ‘주남(朱南)’으로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주남(周南)’은 『시전(詩傳)』에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시편이 있어서 주공(周公)의 덕을 길렀으므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갈구하는 이름이다. ‘주남(朱南)’은 남방 수호신으로서의 남방 별 주작(朱雀)에서 유래된 것 같은데,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고, 의미하는 바도 ‘주남(周南)’이 좋으니 흔히 ‘주남평(周南坪)’이라 하는 것 같다.
이 주남평유공비에는 두 가지가 전하는데, 그 하나는 ‘이덕화·이덕령 불망지비(李德化李德齡不忘之碑)’와 또 ‘전인(前人) 이덕화·이덕령, 시인(時人) 가선(嘉善) 김시용, 낭청(郎廳) 임취봉 영세불망비’인데, 앞의 비는 지금은 그 비신(碑身)이 뒤의 비 곁에 매몰되어 있지만, 그 비문 사본(寫本)을 이덕화 씨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을 통하여 당시 주남보와 주남들의 형편을 가늠해 보자.
“큰 공은 이루기 어렵고 실패하기 쉬우므로 드러낼지언정 묻혀서는 안 된다. 공을 이룸이 크고 작음이 있고 정밀한 것과 조잡한 것의 구별이 있지만,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하나이다. 저 이덕화·이덕령 같은 이도 또한 공이 풍족하고 가상하도다. 아득하게 임들은 가셨지만, 오직 이 주남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그의 어진 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니, 여기에 있어서 그 공이 어찌 보통 사업 따위와 같으리오. 장차 땅이 거칠어질세라 울창한 소나무와 전나무가 관개(灌漑)[전답에 물을 댐]의 자료가 되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곡식을 수확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금년에 와서 김시용·김정현이란 사람이 있어 그들의 뒤를 이어 힘쓴 까닭으로 사방이 가물어 곡식이 없는데, 홀로 여기만 능히 대풍이 들었으니 ‘어느 시대이고 사람이 없으리오’ 할 만하다.”
이 글에서 “사방이 가물어 곡식이 없는데, 홀로 여기만 능히 대풍이 들었으니” 운운한 것을 보면 주남보의 역할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주남평유공비에 기록된 것은 구보(舊洑)[고경면 대의동 거리실 입구에 고경천을 막아 만든 보]에 대한 기록이고, 완산동 북편 큰 강을 막아 더 튼튼하고 장래성 있게 만든 보를 새보[新洑]라 하는데, 모두 넓은 의미의 주남보로서, 주남들 농사에 기반이 된 수리 시설이다.
태백산맥의 정기를 담은 보현산(普賢山)과 서쪽으로 팔공산(八公山), 동쪽으로 운주산(雲柱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남천과 북천이 합류하여 금호강(琴湖江)의 상류를 형성하여 금호강 유역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는 그 넓은 들이 주남들로서, 당시 농업 사회에서 영천 경제의 중심으로 영천인들의 식량 공급원이었을 주남들에 이 주남보와 새보가 물을 대어 영천 경제의 바탕을 튼튼히 해 주었다 할 것이다.
[최고(最古)의 수리비, 영천 청제비(菁堤碑)]
영천 지역의 이러한 수리 시설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 시대에 신라의 수도인 왕경[경주]과 그리 멀지 않았던 영천 지역에 국가에서 저수지를 막고 수리하며 관리 해 준 청못과 그 주변 도남들을 보면, 신라 시대에도 영천은 농업이 중심이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 시대 영천 지역의 농업 경영과 당시 사회를 잘 알려 주는 것이 보물 제517호로 지정되어 도남동 청못 밑에 있는 청제비(菁堤碑)이다.
이 영천 청제비는 6세기 무렵 신라 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 둔 것으로, 현재 청못 밑에 비각을 세워서 보존하고 있는데,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지만 그 중 네모지게 다듬어서 세운 것은 후대인 조선 숙종 대에 이 청못을 보수하고 세운 것이고, 그 옆에 별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에 새겨서 세운 것이 영천 청제비이다. 청제비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힌 채 버려져 있다가 1968년 12월에 당시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되면서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청제비는 양면에 각자(刻字)되어 있으며,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의 것으로 하나는 병진년(丙辰年)의 간지(干支)가 적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정원(貞元) 14년’의 절대 연도가 적혀 있다. 전자가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축제기(築堤記)라고 한다면, 후자는 쌓은 청못이 파손된 것을 수리한 기념으로 새긴 수치기(修治記)인 것이다.
영천 청제비는 비를 세운 절대 연도인 간지가 있기 때문에 그 연대를 알 수가 있어서 발견 당시부터 그 연대와 내용에 대하여 논의가 분분하였다. 특히 병진명(丙辰銘)의 비는 글자가 마멸되어 알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세운 연대부터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현재는 대체로 신라 법흥왕 23년인 536년으로 보고 있는 편이다.하지만 외위(外位) 문제와 관련하여 476년(자비왕 21)으로 한 갑자(甲子)를 올려서 보는 견해도 있다.
청제비 비문의 내용에 의해, 신라 국가에서 영천에서의 상당한 노동력을 동원하여 수리용 제방 시설인 청제(靑堤)를 만들어서 우리 영천 지역의 농사에 편의를 제공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영천에는 신라 중고기[법흥왕~선덕여왕 대]인 6세기, 나아가 5세기라고도 하는 시기에 세워진 귀중한 금석문 자료가 있는 것은 자랑거리이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도 그 연대를 비롯하여, 신라의 직명(職名)과 인명(人名), 관등명(官等名), 그리고 이두식 표기 및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지만, 앞으로도 이 중요한 자료로 더 많은 연구가 이어질 것이다.
또 정원 14년 비문에는 “소문에 사태로 제(堤)가 상하였다고 하므로 내소사에게 시켜 조사케 하고, 정원 14년 월 13일에 청제를 치수하여 기록하노라”고 해석되는 문구로 미루어 보건대, 798년(신라 원성왕 14)에 청못이 파손되었으므로 관리를 보내어 조사케 하고, 청못을 보수하여 그 기념으로 기왕의 ‘병진년 청제비’의 뒷면에 그 사정을 새겨서 세운 것이다. 신라 왕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지만, 영천 지역에 대한 신라의 국가적인 관심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