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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교번 마을 덕진교에 얽힌 이야기. 주막을 운영하는 덕진이라는 여인이 죽어서 새로 부임한 원님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모은 돈으로 다리를 놓아 달라 부탁하는 이야기이다. 원님은 덕진의 부탁대로 다리를 놓고 다리에 덕진의 이름을 붙였다. 변남주가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 주민 서동열에게서 2012년 12월 11일 인터뷰 채록하였다. 덕진면 덕진리에 있는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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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영암 지역 사자봉에 있던 봉수대. 갈두산 봉수(葛頭山 烽燧)는 조선 시대 영암군에 속하였는데 1906년 행정 개편으로 해남군에 편입됨으로서 이후부터는 해남군에 속하게 되었다. 갈두산 봉수는 서남 해안 지역의 해로 상의 요충지에 위치한 입지 조건으로 보아, 수군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갈두산 봉수가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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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하였던 해남군 북일면 남창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선소. 선소(船所)는 배를 정박하거나 수리하는 포구를 말한다. 고달도 선소(古達島 船所)는 남창 마을 해월루의 남쪽에 있는데, 고달도는 현재는 전라남도 해남군 남창 마을에 속하나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에 속하였다. 또한 고달도는 달량, 이진, 남창 등으로 불리었다. 고달도는 조선 초기에는 달량이라고 하였다가,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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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하는 법정면. 영암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이다. 1939년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인해 넓은 해수면이 농토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의 서쪽 첫머리여서 서시면(西始面)이라고 하였다. 성지천(省之川) 등 34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898년(광무 2) 지방 행정 개편에 따라 서종면(西終面)의 서호정(西湖亭) 등 19개 마을을 병합하고, 영암군의 서쪽이므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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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한성(金漢城)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김해 김씨는 조선 중기에 영암 지방에 입향한 성씨로, 영암군 서호면 일대에 집거하고 있다. 입향조 김한성의 증손인 김완(金完)이 영암 향안 중수 작업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김극희(金克喜), 김함(金涵), 김여옥(金汝沃) 등 다수의 인물이 국란을 당하여 창의하거나 군공을 세웠다. 김극조·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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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제사를 올렸던 전라남도 영암군의 사당. 전라남도 영암군 남해신사(南海神祠)는 우리나라 3대 해신제 중 하나인 남해신사 해신제를 올렸던 곳이며, 나라의 안녕과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남해신사라는 이름은 『고려사(高麗史)』·『동국 여지지(東國輿地志)』·『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오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남해신 사당(南海神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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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 지역 달마산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봉수. 달마산 봉수(達摩山 烽燧)는 조선 시대 영암군에 속했으나,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된 뒤로 계속 해남군에 속하게 되었다. 달마산 봉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에 처음 기록을 보이고 있는데 완도(莞島) 봉수[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 숙승봉]로부터 연락을 받아 관두산 봉수[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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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있었던 덕진 다리에 얽힌 이야기.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덕진면 경계에는 영암천이 흐르는데, 옛 이름은 덕진천이다. 덕진천에는 덕진교가 놓여 있었고, 덕진교의 서쪽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덕진포 포구였다. 덕진교는 덕진면 덕진리 교변 마을과 영암읍의 역리 마을 사이에 있어 나주에서 영암읍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통과하여야 한다. 그런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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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와 영암읍 역리를 연결하는 교량. 덕진교는 덕진면 덕진리와 영암읍 역리 사이에 있는 영암천을 건너는 다리로 국도 13호선에 위치한다. 지금의 덕진교가 있는 자리에서 서쪽으로 약 60m 지점에는 조선 시대에 건설된 덕진교가 있었다. 고려 시대 독나루가 있던 곳에 조선에 들어와 덕진교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덕진교의 서쪽에는 덕진포가 있었다. 덕진교 아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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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덕진면 사이 바다에 있었던 포구. 덕진포는 조선 시대 전라남도 영암군에 있었던 포구로, 덕진교의 서쪽 바다에 있었다. 조선 시대 영암군 읍치와 가장 가까운 포구로 바다로 통하는 문[海門] 역할을 하였다. 근대 시기 덕진교 서쪽에는 모래사장이 발달하여 단오 축제를 열기도 하였지만, 포구는 퇴적으로 인하여 수심이 깊지 않아 큰 배는 다닐 수가 없었다. 조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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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에 있는 저수지. 마산 저수지의 명칭은 압곡(鴨谷) 마을 서편에 있는 마산(馬山)[37m]에서 기원한다.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마산 북쪽에 건립되었다. 1944년 1월 1일 착공, 1945년 12월 31일 준공하였다. 하지만 1915년에 발간된 『지적 원도』에는 노송리 766번지의 지목이 지소(池沼)로 분류되어 있어 조선 시대부터 있던 방죽을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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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달을 시조로 하고 유관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세거하는 성씨로, 입향조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유관(柳寬)[1346~1433]이다. 문화 유씨가 모산에 오랫동안 세거했기 때문에 모산 유씨(茅山柳氏)라고도 불린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이전에 모산리는 나주군 비음면 모산리에 속했다. 문화는 황해도 신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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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에 있었던 포구. 망호리 배널리 포구는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며, 원해창 또는 구해창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12대 조창, 즉 장흥창이 설치된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는 부춘정 동쪽 건너편으로 비정되며, 속칭 ‘뱃마테’ 또는 ‘배나테’라고도 하였다. 바다였을 당시에 갯고랑이 망호리 배널리 포구와 부춘정 앞을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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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운재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전기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영암의 보현원(普賢院)은 덕진면 영보리 보동 마을 영원재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폐원되었다. 역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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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정부 세곡 창고. 조선 시대 곤일종면 지역으로서 영암군의 서쪽에 창고가 있어 서창이라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 조에 의하면, “서창은 영암에서 서쪽으로 40리[15.71㎞]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삼호읍 원서창 마을을 말한다. 서창 마을은 이칭 창말, 창촌이라고도 한다. 창고 터는 서창 마을의 북쪽, 즉 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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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에 있었던 포구. 서창 포구는 조선 시대 서창(西倉)에 있었던 포구이다. 조선 시대 영암의 서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서창이라 하였으며, 조선 시대 서호면, 학산면, 삼호읍 일대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대동지지(大東地誌)』 창고조에 의하면 “서창은 영암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원서창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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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태백리에 있었던 나루. 소댕이 나루는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장에 가거나 일로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 목포 등을 왕래할 때 주로 이용하였던 나루이다. 나루 사이 물길에는 소댕이샘이 있는데, 이를 돌아 건넜다. 조선 시대 지리지 기록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지도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후기에 등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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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 부선 마을 지역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시대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영암의 수원(燧院)은 신북면 부선 마을에 설치된 원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원은 폐원되고 꼭 필요한 곳에서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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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경(白宇經)을 시조로 하고 백광훈(白光勳)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전라남도 영암군에 세거하는 성씨 중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까지는 영암에 속했던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에 기반을 둔 성씨이다. 수원 백씨의 시조 백우경은 중국 소주(蘇州) 출신으로,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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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사선(士善), 호는 매당(梅堂)이다. 통례(通禮) 신후경(愼後庚)의 후예이고, 감사(監司) 신기(愼幾)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봉사(奉事) 신원개(愼元凱)이다. 부인은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생원 이유회(李惟誨)의 딸이며, 동생으로는 신여훈(愼汝訓)·신여원(愼汝謜)·신여눌(愼汝訥)이 있다. 신여의(愼汝誼)[1567~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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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에 있는, 을묘왜란 때 의병장 양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양달사(梁達泗)[1518~1555]의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남암(南岩)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감역(監役) 양흥효(梁興孝)의 증손이며, 주부(主簿) 양승조(梁承祖)의 아들이다. 삼종숙(三從叔)인 양팽손(梁彭孫)의 문인이다.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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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영암군에 속하였던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등에 있었던 수군진. 한반도의 서남 끝단에 위치해 있는 송지 어란은 고대부터 한중일 국제 해상로뿐만 아니라 제주도 해로와 조운로의 중간 기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어란포진은 조선 시대 수군 만호진이 머물렀던 곳인데, 두 차례 이동되어 현재의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정착하였다. 첫 번째는 해남현 화산면 연곡리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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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앙과 지방간 명령 전달 및 운수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암 일대에 설치되었던 교통 및 통신 제도. 역참 제도는 역부와 역마를 이용하여 관물의 수송, 공문서의 전달, 관리들의 숙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역(驛)은 삼국 시대부터 이미 설치되었다. 고려 성종 대에 와서 12목 군현제의 확립과 더불어 역참제가 구체화되었고, 현종 대에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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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열녀와 열부. 조선 시대는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국가는 이들 덕목의 실천자들인 충신·효자·열녀들에게 관작을 제수하거나 정려(旌閭)로서 칭송토록 배려하였다. 영암 지역에는 많은 열녀와 열부들이 기록과 정려를 통하여 전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충·효·열의 기념비적 유적들이 남아 있은데, 정려 외에도 효열비나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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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와 영암읍 역리에 설치되었던 교통 통신 기관. 고려 성종 대에 전국을 12목으로 나눈 군현제의 확립과 더불어 구체화된 역참제는 현종 대에 와서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驛)으로 완성되었다. 이때 영암 영보역의 경우는 승라주도(昇羅州道)에 속한 30개 역 중의 하나로 나주의 청암도역 관할에 속하였다. 각 역에는 말과 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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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남풍리·동무리·역리에 걸쳐 있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읍성 터. 영암읍성이 있는 영암읍 일대는 삼국 시대부터 군현이 설치되어 운영되어 왔던 곳이다. 백제 때 월나군[月奈郡]이었다가 통일 신라 때인 757년에 영암군(靈巖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성종 때는 일시 낭주 안남 도호부(郎州安南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1018년(현종 9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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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 있는 천안 전씨 문중 사우. 영암 장동사(靈巖 長洞祠)는 천안 전씨(天安全氏)의 문중 사우(祠宇)로, 전몽성(全夢星)[1561~1597]과 아우인 전몽진(全夢辰)[1565~1597], 전몽태(全夢台)[1571~?]를 배향하고 있다. 영암 장동사는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전몽성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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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보를 시조로 하고 육기평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옥천 육씨는 전라남도 영암군의 세거 성씨 가운데 하나로, 입향조 육기평(陸基平)이 학산면 매월리에 입향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옥천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이다. 시조 육보(陸普)는 당나라 사신으로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귀화하였고, 경순왕의 총애를 받아 부마가 되었다. 관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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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흑천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영암군 옥천시면 지역의 정부 세곡 창고. 옥천창(玉泉倉)이 있었던 지금의 해남군 옥천면 흑천리는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 옥천시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옥천창은 옥천시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의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조선 시대 영암군 옥천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흉년을 대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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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열녀. 본관은 영광(靈光). 의병장 김여중(金汝重)의 딸이며 윤유성(尹惟誠)의 처이다. 윤유성 처 김씨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결국 남편이 22세의 나이로 죽자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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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영암군에 속했던 현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있었던 수군 만호진. 이진진(梨津鎭)은 지금은 해남군 북평면 지역이나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에 속한 지역에 있던 수군진이다. 지금의 해남군 남창인 달량에서 남쪽으로 800여m 떨어진 수군진이다. 이진진은 1555년(명종 10) 달량진 왜변 후인 1597년(선조 30) 종9품의 권관진이 설치되었다가 1627년(인조 5)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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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의 정부 세곡 창고. 이진창(梨津倉)이 있었던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은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이진창은 지금의 해남군 북일면, 북평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 조에 의하면 “이진창은 영암에서 남쪽으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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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열녀. 남편은 임자근노미(林者斤老味)이다. 임자근노미 처 유소사(劉召史)는 남편이 죽자 친히 시체를 씻겨 옷을 입힌 뒤 낫으로 자결하였다. 『영암읍지』에서는 남편이 죽으니 친히 스스로 염습을 하고 낫을 가져다가 자살하여 죽으니 영조 계미년에 이 사실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1763년(영조 39)에 나라에서 임자근노미 처 유소사를 정려(旌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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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생활용수·농업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하천이나 골짜기의 물을 막아 모아 두고 관리하는 인공 시설. 영암 지역은 남동쪽은 월출산[809m] 자락으로 지대가 높으며, 북서쪽은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월출산에서 발원하는 영암천과 군서천은 북서쪽으로 흐르며, 구릉지에서 나온 샛강을 합류하여 충적 평야를 이룬다. 가학산[575m]과 흑석산[653m]에서 발원하는 망월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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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 있는 전몽성·전몽진·전몽태 삼형제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 전씨 충효문(全氏 忠孝門)은 천안 전씨(天安全氏) 문중의 전몽성(全夢星)[1561~1597]과 전몽진(全夢辰)[1565~1597]의 충절을 기리고, 전몽태(全夢台)[1571~?]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워진 정문(旌門)이다. 전몽성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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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영암 출신의 열녀. 남편은 조도명(趙道明)이다. 허소사(許召史)는 19세에 조도명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해에 남편이 죽었다. 성복(成服) 전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제사상 밑에 엎드려 7일 동안 금식하여 조용히 죽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허소사는 일찍이 남편이 죽었지만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으며 제사도 소홀함 없이 정성껏 치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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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영암에서 수도까지 세곡을 배로 운반하던 국가 제도. 고려 시대 영암에는 12대 조창으로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었다. 영암군의 관할 아래 있는 영암, 해남, 강진 일대의 세곡을 모아 조운선에 실어 개경에 납입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영암군은 나주 영산창에 세곡을 납부하였다가, 1512년(중종 7)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포창으로 이관되자 법성포창으로 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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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에 있었던 나루. 주룡포는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 미교 마을 나릿개에서 영산강을 건너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를 왕래하던 나루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주룡진(駐龍津)은 남쪽 50리에 있으며 영암의 경계로 통한다.”라고 한 곳이다. 주룡은 영암과 무안 사이를 흐르는 지금의 영산강 물길을 말하는데, 약 500m의 좁은 물목이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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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학송리 지역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전기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다. 영암의 청풍원(淸風院)은 조선 전기에 지금의 영암읍 학송리 개신리 미륵동 마을 지역에 설치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폐원되었다. 역참 제도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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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영암 출신의 열녀. 남편은 최상두(崔尙斗)이다. 최상두 처 이씨(李氏)는 남편이 죽자 남편의 관 옆에서 끊임없이 울다가 조용히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남편이 죽자 관 옆에서 곡을 하였는데 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 시간이 되자 광중(壙中)[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들어가고자 힘을 써서 시아버지가 겨우 끌어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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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영암의 녹동 서원에 배향된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필경(弼卿), 호는 산당(山堂)이며 광주[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용(司勇)[조선 시대 오위(五衛)의 정구품 군직] 최별(崔潎),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부인은 참의 이약수(李若水)의 딸인 전의 이씨이다. 최충성(崔忠成)[14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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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했던 남해안의 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북서쪽에 있는 추자도는 조선 시대에는 대개 전라도 영암군이 관할하여 오던 섬으로, 조선 후기에는 죄인을 귀양 보내는 유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행정 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속하며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두 개의 섬으로 나뉘는데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어장과 풍부한 어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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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세곡 창고. 영암군 군서 해창은 별칭 원해창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영암군 일대에서 생산된 대동미 등 세곡을 해창에 모았다가 배에 싣고 한양으로 출발한 곳이다. 그런데 이전의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나 19세기 무렵 망호리의 뱃길이 토사의 퇴적으로 어려워지자 군서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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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효성으로 부모를 잘 섬긴 사람. 조선 시대는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국가는 이들 덕목의 실천자들인 충신·효자·열녀들에게 관작을 제수하거나 정려(旌閭)로서 칭송토록 배려하였다. 영암 지역에는 많은 효자들이 기록과 정려를 통하여 전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충·효·열의 기념비적 유적들이 남아 있은데,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