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 가 > 근현대의 형성과 지역 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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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초부터 4월 하순까지 영암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 운동. 1919년 3월 초 영암군에도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극환(曺克煥)·최한오(崔漢五) 등 영암읍과 구림리의 뜻있는 이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를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 4월 10일 영암읍 장날에 맞추어 아침 일찍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전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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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하여 영암군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대규모 학생 반일 운동.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한국인 통학생과 일본인 통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대규모 항일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신간회와 청년 학생 운동 세력은 진상 규명과 함께 항일 투쟁의 확대를 시도하여 3·1 운동 이래 최대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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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지방에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반대한 개인과 단체의 저항 운동. 전통적으로 영암은 전라도 지역 교통의 요지이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주요한 침투 대상으로, 강한 경제적 침략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여기에다 일찍부터 사족의 문화가 발달하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던 만큼 항일 운동의 전통도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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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미군정의 쌀 강제 공출 정책에 맞서서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을 포함한 전국의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 1946년 경제 정책 실패로 쌀 가격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농민들에게서 쌀을 강제로 수집했고, 조선 공산당 등 좌익은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자 총파업과 공출 거부 투쟁을 시도하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1946년 9월과 10월에 대규모 폭동과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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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해 조직되었던 민간 자치 기구. 1945년 8월 광복 직후 좌우익이 함께 참여했던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 우익이 탈퇴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은 건국 준비 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해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의 건국 준비 위원회 지회들은 지역별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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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조직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한 임시 행정 기구.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대비한 비밀 조직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자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치안 유지와 건국 준비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전국의 도, 시, 군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급속히 결성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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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 해방과 남북한의 분단, 6·25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 역사 시대를 말한다. 영암은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며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의 쇠퇴와 농촌 인구의 감소, 노령화 등 위기를 겪었으나 새로운 산업의 개발과 풍부한 역사적 전통, 수려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