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99 |
---|---|
한자 | 忠州石氏 |
영어공식명칭 | Chungju Seo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식 |
본관 | 충주 - 충청북도 충주시 |
---|---|
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
성씨 시조 | 석린 |
입향 시조 | 석종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석린(石鄰)을 시조,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 석린은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와 공을 세우고 예성군(蘂城郡)에 봉군되었고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연원]
충주 석씨의 시조 석린은 고려 의종 때인 1147년에 중국에서 건너와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과 도원수에 올랐고 예성군에 봉군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충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에서 5세까지 벼슬이 이어졌고 6세손 석양선(石良善)의 부인 최씨(崔氏)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8세손 석여명의 세 아들을 중심으로 분파하여 충주 석씨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입향 경위]
석린의 18세 석종(石琮)이 선조 때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광해군 때 사임하고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 삽곡(鍤谷)에 입향하여 약 400년간 세거하고 있다. 합천에서 이 마을로 입향하여 당시 왕산 동편 부원산 아래에서 삽과 같은 지형에 왕재(王才)가 태어난다고 하여 삽곡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황]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와 오도리, 문방리, 용암면, 월항면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특히 월항면에 사는 충주 석씨는 24세 석치중(石致重)의 자손으로 20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선남면 문방3리는 선조 때 석득건(石得建)이 이곳에 입향한 후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성주군에 293명의 충주 석씨가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2리에 석종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삽실 마을 서편에 재사를 짓고 개산재(介山齋)라 편액하였으나, 그 후 오랜 기간 풍우로 훼손되어 1936년에 동편으로 이건하여 재명을 삼산당(三山堂)으로 고쳤다. 선남면 도흥2리 삽실 마을과 차골 마을로 향하는 도로의 갈림길인 삼거리에 못 미쳐 동쪽 산록 아래에 애국지사석호문공덕비(愛國志士石鎬文功蹟碑)가 위치한다. 용암면 사곡리 싯질 마을 중앙에는 석치중을 추모하는 재사인 낙은당(洛隱堂)이 있었는데 건물이 없어진 그 자리에 낙은처사석공유허비(洛隱處士石公遺墟碑)가 세워졌다. 대가면 금산2리에는 석열부정려각(石烈婦旌閭閣)이 있다. 열부 석씨는 석진하(石鎭厦)의 딸이며, 진양인 하수범(河守範)의 아내이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모셨고, 남편이 병이 들자 밤마다 하늘에 자신으로 대신하기를 빌었다. 마침내 자신은 죽고 남편은 회생하여 장수를 누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효와 열(烈)로 칭송받는 사람이 많지만 그와 짝할 사람은 드물다’라 하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