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지
-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법정면. 성주군과 관련한 각종 읍지[『경산지(京山志)』,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 『읍지잡기(邑誌雜記)』, 『성산지(星山誌)』]에 따르면 가천 지역은 원래 이물(爾勿) 또는 이물역으로 불렀으나 1845년(헌종 11) 성주목사 김횡(金鑅)[1784~1847]이 이름이 누추하고 괴이하다면서 ‘가천(伽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가천은...
-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이황이 시조이고 이우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
경상북도 성주군 교육의 변천과 현황. 성주향교(星州鄕校)는 조선 시대 성주의 공립 중등 교육 기관으로 1397년(태조 6) 한양에 성균관(成均館)을,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울 때 세워졌다.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 편의 43개 향교 중에도 성주향교가 등장한다. 성주향교 대성전과 동무·서무, 명륜당, 입덕문, 수업사, 고사 등의...
-
1991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발행한 향토지. 『내고장 성주』는 경상북도 성주군의 인물, 역사, 문화, 유적, 유물, 자연물 등을 소개한 향토지이다. 1991년 9월에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집필 위원[김봉식, 박학규, 윤태호, 임길상]을 구성하고, 성주의 역사적 사건, 유적, 유물, 전설, 옛 풍습, 특산 명물, 명승과 경관, 희귀 동·식물, 유서 깊은 나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 칠산 꼭대기에 있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터. 성주 대황당(大隍堂)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 칠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마을 신당이다. 원시 시대부터 할미신[老姑神. 일명 댕대이산 할매]을 토속신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던 민간 신앙지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유적이 있는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는 성주읍성...
-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유생. 본관은 성산(星山)[경상북도 성주군]. 호는 묵치(黙癡). 도형(都衡)[1480~1547]의 후손이다....
-
고려 후기 성주 출신 문신인 이숭인이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자안(子安)이다. 저서로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관광집(觀光集)』, 『봉사록(奉使錄)』, 『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뒤에 있는 매적산(梅積山)[495.9m]의 ‘매(梅)’ 자와 수남(水南)의 ‘수(水)’ 자를 합쳐 ‘매수(梅水)’라고 이름하였다. 매수1리의 자연 마을로 무나물[무나말·하남(河南)·수남(水南·樹南)·수촌(水村)]과 다징기[가수촌(加樹村)]가 있고, 매수2리의 자연 마을로 새월[신월(新月)]과 불미골[야동(冶...
-
고려 후기 본관이 성주인 문신. 본관은 성산(星山)[성주(星州)]. 성산 배씨[성주 배씨]의 시조는 신라의 모체인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장 배지타(裵祗沱)이다. 그 후손이 고려 개국 공신 배현경(裵玄慶)이다. 성주에서는 배현경의 후손인 배위준(裵位俊)을 성주의 1세조로 하고 그 5세손 배인경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흥안 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진 연유로 성산[성주]...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 있는 법정리. 마을 뒤에 봉황 머리 모양의 산[대광산]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안에 냉천(冷泉)과 큰 정자나무가 있어 ‘봉정(鳳亭)’이라 이름하였다. 봉정1리 자연 마을로 무징이[수정(水亭)], 봉산(鳳山), 칠성리(七星里)가 있고, 봉정2리 자연 마을로 조양(朝陽), 학고(鶴皐), 죽내(竹內)[외죽(外竹)·대내], 대안(大安)[내죽(內竹)·죽천(竹川)]이 있...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직단 터. 사직(社稷)은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시행하는 여러 제사 중 하나로, ‘사(社)’는 토지의 신을, ‘직(稷)’은 오곡의 신을 뜻한다. 즉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하며, 우리나라 사직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직의 실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
-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류성간이 시조이고, 류한경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
1937년 이순흠이 석인본으로 간행한 성주군의 읍지. 이순흠(李舜欽)[1872~1945]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자는 선약(善若), 호는 학산(學山)이다. 문장이 탁월하여 18세에 성주의 향교장을 지냈다.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에 이순흠이 자비로 봉황지(鳳凰池)를 만들어 주민들의 관개(灌漑)를 도운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는 왕버들 숲.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 성주 8경 중 5경에 해당한다. 1380년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성주읍성(星州邑城) 밖 하천 주변에 조성된 숲으로 300~500년생 왕버들 52주가 생육하고 있다. 풍수지리, 역사, 문화, 신앙에 따라 만들어진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향토성, 민속성, 역사성 등의 가치가 높다. 왕버들 단일종으로 이루어진 숲으로...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 건축물. 성주 성산관(星州星山館)은 조선 시대 관아 건축물의 하나로, 고을의 수령이 행정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성주목(星州牧)의 동헌(東軒)으로 쓰이던 건물이며 아사(衙舍), 군아(郡衙), 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불렸다. 성주읍성(星州邑城)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관청 건물이다....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용기사지에 있는 조선 전기 석조 유물. 성주 용기사지 석조 유물(星州用起寺址石造遺物)은 용기사지(用起寺址)에 남아 있는 돌로 만든 석조(石槽) 1점과 맷돌 3점으로, 당시 용기사(用起寺)에서 생활하던 승려들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유물이 발굴된 용기사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조선 시대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예산리·백전리에 있는 고려 후기 읍성. 성주읍성(星州邑城)의 처음 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기록에 따르면 1380년(우왕 6)에 토성이었던 것을 1520년(중종 15)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방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문중에서 대대로 적장자를 중심으로 부계 혈통이 이어져 내려온 집과 그 집에서 존속되어 온 문화. 원래 ‘종(宗)’은 사전적 의미로 집[宀]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대(臺)의 상형을 합친 회의 문자이다. 즉, 조상신을 모시는 집, 사당(祠堂)을 뜻한다. 또한 조상이나 족장(族長)을 의미하거나 특정 시조의 자손을 포함하는 친족의 범주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
-
1996년과 2012년에 발행한 경상북도 성주군의 향토지. 『성주군지』는 경상북도 성주군의 향토지 또는 지방지로서 『성주군지』[1996]과 『성주군지』[2012] 상권·하권이 있다. 향토지는 한 지방의 연혁, 지리, 인물, 산업,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
1961년 전호봉이 국한문으로 편찬한 성주군의 향토지. 『성주대관』은 1961년 2월 전호봉(全壕峰)이 『경산지(京山志)』, 『성산목읍지(星州牧邑誌)』, 『성산지(星山誌)』 등을 참고하여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했으며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경북사적(慶北史蹟) 제4집으로 간행된 것을 보면, 4.19 혁명 이후 지방 자치가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각 시군의 향토사(鄕土史)를 정리하려는 기...
-
조선 시대 성주목을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조선 개국 당시 성주는 경상도에서 가장 넓은 간전 결수(墾田結數)[간전은 개간하여 만든 밭]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로 상주, 진주와 함께 경상우도의 중심된 큰 고을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 경산부(京山府)로 있다가...
-
경상북도 성주군의 중심지이며 역사적으로 읍치의 상징인 성주읍성을 재현한 공간.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은 과거에 성주읍성(星州邑城)이 있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번지[성주읍5길 37-1] 일원에 성주읍성을 재현하고 주변 공간을 정비하여 도심 공원으로 만든 공간이다. 성주의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여 성주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성주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읍성 밖에 조성된 왕버들 숲.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46-1번지 일대에 있으며, 조선 중기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성주읍성(星州邑城) 서문 밖에 조성한 전통 비보림(裨補林)이다. 비보림은 풍수지리적으로 지세(地勢)가 약하거나 주변 환경에 결점이 있으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을 말한다. 조성 당시...
-
1931년 성주군 성주읍 소재 연계당에서 간행한 읍지. 『성주지(星州誌)』[1931]는 1928년 당시 성주군수였던 조경하가 향내의 유생들과 함께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완간(完刊)하지는 못하였다. 1931년 성주군 성주읍 소재 연계당(蓮桂堂)에서 미완인 상태 그대로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에는 저작 및 발행자인 조경하(趙鏡夏)의 경오년[1930] 서문이 있고 권말에 간행...
-
성주 지역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동일한 인물을 시조로 하는 성씨. 삼국 시대 때 성씨는 왕족과 귀족만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특권이었다. 후삼국 시기를 거치면서 호족이나 고려의 개국 공신들이 성씨를 사용했고, 시조(始祖)의 출신지나 거주지를 본관(本貫)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시대를 지나면서 성씨를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특권이 차츰 사라졌고, 조선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영천리에 걸쳐 있는 수많은 영남 지역의 성 중 가장 규모가 큰 산성.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영천리에 걸쳐 있는 독용산성(禿用山城)은 현존하는 수많은 영남 지역의 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양성지(梁誠之)가 『눌재집(訥齋集)』에서 조선을 ‘성곽(城廓)의 나라’라고 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성이 아주 많았다. 남한에서만도 1,300여...
-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관산(鸛山).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는 고려 태조 대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 이능일(李能一)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능일의 5세손이 이견수(李堅守)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능일의 15세손 이중화(李重華)이다. 참봉(參奉) 벼슬을 한 이중화의 호가 기국(杞菊)·기국옹(杞菊翁)이어서 이중화를 기국공파(杞菊公派) 파조...
-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이능(李能)은 광평 이씨(廣平李氏)이다. 광평은 성주의 옛 고을 이름 중 하나이다. 성주에는 성주를 본으로 하는 이씨가 벽진 이씨(碧珍李氏), 성주 이씨(星州李氏), 성산 이씨(星山李氏), 광평 이씨, 경산 이씨(京山李氏), 가리 이씨(加利李氏) 등 여섯으로 ‘성주 6이(李)’로 불린다. 이능은 재상 이조년(李兆年)[1269~1343]의 형인 이억년(...
-
고려 건국 초기 성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성산 이씨의 시조. 이능일(李能一)은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로서 대략 10세기에 생존 및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산 이씨는 벽진 이씨(碧珍李氏), 성주 이씨(星州李氏), 광평 이씨(廣平李氏), 경산 이씨(京山李氏), 가리 이씨(加利李氏)와 함께 경상북도 성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주 6리(李)의 하나이다....
-
성주 지역으로 이거한 고려 후기 문신이자 경산 이씨 시조. 이덕부(李德富)는 경산 이씨(京山李氏) 시조이며, 생몰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경산(京山)은 현 경상북도 성주군의 옛 이름 경산부(京山府)를 가리킨다. 고려 시대에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1106~1179]와 이의방(李義方)[?~1174] 등에 반대하여 경산부로 이주하면서 경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성주에는...
-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대장군 정의(鄭顗)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정응상(鄭應祥)으로 김굉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으로 이환(李煥)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구의 형은 정곤수(鄭崑壽)[1538~]인데 여섯 살 때 종숙 정승문(鄭承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자랐다. 정곤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