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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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공식명칭 | Gimnyeong K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지국 |
본관 | 김녕 - 경상남도 김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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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용암리 |
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
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 |
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
성씨 시조 | 김시흥 |
입향 시조 | 김연|김석벽|김명중|김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김시흥을 시조로 삼는다. 김시흥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 김녕군(金寧君)으로 봉군되었다.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에 봉해졌다. 김수로의 후손을 선김(先金), 김시흥의 후손을 후김(後金)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하지만 선김과 후김이 동일한 본관을 사용함으로써, 여러 가지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자 김녕군 문중에서 1849년(헌종 15)과 1884년(고종 21)에 조정에 청원하여 결국 예조의 비준을 받아 본관을 김녕으로 확정지었다.
[연원]
경상북도 성주군에는 9세손 김문기(金文起)와 13세손 김준영(金俊榮)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김문기의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忠毅)로, 충의공파(忠毅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단종의 충신 중 한명으로 단종복위운동으로 화를 입자, 그 후손들이 충청도 옥천에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김준영의 자는 태진(泰晋),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2세의 나이에도 선조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난이 평정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분성군(大匡輔國崇祿大夫盆城君)에 봉해졌다.
[입향 경위]
김문기의 후손 중 성주에 우거한 인물은 김연(金演)[1569~1642], 김석벽(金錫壁)[1652~1734], 김명중(金命仲) 등이 있다. 김연은 김충지(金忠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영수(金永守)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용암리 달밭으로 우거하였다. 3남 김일립(金逸立)의 후손이 수륜면 오천리, 6남 김준복(金俊福)의 후손이 월항면 보암리, 조카 김하우(金夏雨)의 후손이 용암면 계상리에 살았다. 김석벽은 김문기의 증손 김인지(金仁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범동(金範銅)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성주의 금수면 어은리로 우거하였다. 김명중은 김문기의 증손 김상지(金尙之)의 후손으로 신상복(申尙福)과 함께 가천면 법전리 아전촌(蛾田村)에 마을 터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 김문기의 증손 김욱지(金旭之)의 후손은 선남면 동암리에 세거한다. 김수의 후손은 김수(金壽)[1621~?]를 성주 입향조로 삼는다.
[현황]
경상북도 성주군에 세거하는 김녕 김씨는 2015년 기준 848명이 확인된다.
[관련 유적]
김녕 김씨 충의공파 문화유산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용암리의 경돈재(景遯齋), 금수면 어은리의 모암재(慕巖齋) 등이 있다. 경돈재는 1930년경 김연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고, 모암재는 1921년 김석벽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외에 김석벽의 아들 김중익(金重益)이 무신난 때 공훈을 세웠는데, 그 공적은 「선산기공비(星山紀功碑)」에 실려 있다. 충정공파의 문화유산으로 성주읍 대흥리에 남산서당(南山書堂)이 있다. 김수의 8세손 김성언(金性彦)[1857~1917]이 세운 것으로 김재식(金在植)[1884~1944] 등이 수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