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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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話-文學-伽倻山 |
영어공식명칭 | Gayasan Mountain, which bears myths and gives birth to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구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에 걸쳐 있으면서 다양한 갈래의 문학에 풍부한 소재의 원천이 되어 온 산.
[개설]
가야산(伽倻山)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창작의 영감을 끌어내는 산이었다. 이는 다양한 갈래의 문학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생성되어 온 사실로 알 수 있다. 가야산은 이에 어울리게 해동(海東) 십승지(十勝地), 조선 팔경, 12대 명산 등으로 불리었고, 해인사(海印寺)·심원사(深源寺) 등 고찰(古刹)이 지어졌다. 가야산의 이러한 문화적 면모만큼 가야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이 많고 암봉이 뚜렷하고 깊은 계곡과 맑은 계류가 많아 일찍이 사람들에게 명소로 기억되어 왔다. 한편 가야산은 계절별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수목이 울창하여 동물상(動物相)과 식물상(植物相)도 다양하다. 이제 가야산은 뛰어난 자연환경 요소와 함께 다채로운 문학의 현장으로서 다른 산에서 찾기 어려운 명산으로 발돋움하고 있고, 보다 풍부한 콘텐츠로 개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와 칠불봉 신화]
가야산과 관련된 대가야(大伽倻) 시조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현조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석이정전(釋利貞傳)」과 「석순응전(釋順應傳)」을 인용한 내용이다. 옛 가야산에는 성스런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의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 주려는 마음을 품고 힘을 얻기 위해, 가야산 큰 바위 아래에 제단을 차려 놓고 하늘 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의 짝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정견모주의 정성에 감동한 이비가지가 어느 늦은 봄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온다. 하늘 신 이비가지와 가야산 처녀 산신 정견모주는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되었다. 이들은 옥동자 둘을 낳아 형은 뇌질주일(惱窒朱日), 아우는 뇌질청예(惱窒靑裔)라 하였다. 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았는데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하였고, 아우는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가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은 대가야의 첫 번째 임금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었고, 아우는 금관가야국의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가야산 정상 칠불봉(七佛峯)에는 정견모주의 손자들과 얽힌 전설이 있다. 정견모주의 둘째 아들인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여 왕자 10명을 두었다. 첫째는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는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칠불봉에서 도를 닦았다. 일곱 왕자를 그리워한 황후 허황옥은 가야산을 찾았으나, 이미 출가한 일곱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허황옥은 왕자들이 수도하던 봉우리가 그림자 져 비치는 연못에서 그림자만 보고 그리움을 달래고 돌아갔다고 전한다. 가야산 정상 우측 봉우리들을 칠불봉이라고 하였고, 연못은 그림자 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고 하였다. 일곱 왕자는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으로 수도처를 옮겨, 그곳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영지의 전설도 남아 있다.
[신화를 머금은 가야산의 산세]
“임진왜란 때 금강산·지리산·속리산·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戰火)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소백산과 이 산에는 닿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예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라고 『택리지(擇里志)』에서 가야산(伽倻山)을 밝히고 있다. 가야산은 해동 십승지, 조선 팔경으로 이름나 있고 해인사로 유명하다. 해인사 홍류동(紅流洞)은 우리나라 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우두봉, 즉 상왕봉(象王峯)[1,430m], 주봉인 동쪽의 칠불봉[1,433m]과 두리봉[1,133m]·남산(南山)[1,113m]·단지봉[1,028m]·남산 제1봉[1,010m]·매화산(梅花山)[954m] 등의 능선으로 둘러져 있다. 만물상(萬物像) 능선은 우두봉과 칠불봉에서 서성재를 지나 뻗어 내린 해발 900~1,000m의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만물상의 상아덤에는 정견모주와 이비가지가 만나 혼인한 곳으로 전하는 가마 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서려 있다.
가야산 남쪽 홍류동 계곡의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에서 가야천이 되고,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을 거쳐 낙동강 지류인 안림천이 된다. 북동쪽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서 대가천이 되어, 고령군 운수면으로 흐른다. 안림천과 대가천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서 합류해 회천이 되고, 우곡면에서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과 야로면,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과 가천면은 수계상으로 낙동강 지류인 ‘회천권’이라 할 수 있다. 가야산과 가야천[안림천], 대가천, 회천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의 혜택으로 비옥한 영토를 조성한다.
[가야산과 한시]
성주와 관련된 시문을 남긴 선비들은 많다.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1269~1343],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석재(石齋) 박효수(朴孝修)[?~1337],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 형재(亨齋) 이직(李稷)[1362~1431],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1437~1487], 목계(木溪) 강혼(姜渾)[1464~1519],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1517~?],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운강(雲江) 조원(趙瑗)[1544~1595], 계촌(桂村) 이지익(李之翼)[1625~1694],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후산(厚山) 정재화(鄭在華)[1905~1978] 등이다. 이들은 가야산을 생각하고 성주를 지나가며 단순한 심정을 토로하거나, 성주에서 생활하며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생활의 정서를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일찍이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동년 사공실의 시에 차운하여, 사명을 받들고 가야산으로 가는 권 사관을 보내며[次同年司空實韻送 權史官奉使伽耶山]」에서, “가야산 경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빼어났고/ 천 년 세월 동안 고운과 짝할 이 드물다네[伽耶之山最奇絶 千載孤雲罕疇匹].”라고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나아가 「흰 구름[白雲]」에서 “흰 구름 남쪽으로 흘러가니 그림자도 따라 날고/ 하늘 끝 가야산은 더욱 아득하여라[白雲南去影翩翩 天際伽耶更渺然].”라고 하였다. 가야산의 최치원처럼 자유롭게 가야산에서 노닐고자 하였다.
이황은 처가인 의령으로 가면서 성주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가야산을 바라보며[望伽倻山]」를 지었다. “옛 가야의 땅에 있는 가야산/ 이어진 겹겹의 봉우리 높다랗게 솟아 있네/ 옥생의 기운 아스라이 자줏빛 하늘에 닿아 있어/ 흡사 성모가 푸른 노을을 탄 것 같네[伽倻山在古伽倻 連峯疊嶂高嵯峨 縹氣漫漫接紫霄 疑是聖母凌蒼霞].”라고 형상화하였다. 가야산 관련 설화와 자유로운 최치원의 삶을 결부시키며, 그 경계에서 흥겹게 노닐고 싶어 하였다.
정구는 「회연초당에 씀」, 「회연에서 우연히 읊음」, 「새벽에 일어나 우연히 읊음」, 「숙야재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 등의 성주와 가야산과 관련된 시를 읊었다. 정구는 지금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자리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짓고 가야산 일대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정구는 가야산의 산하는 천리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정구는 숙야재에서 「숙야재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夙夜齋 望倻山]」라는 시를 남겼다. “전신의 참모습을 아니 내놓고/ 기묘한 한 꼭대기 살짝 드러내/ 조물주 숨은 뜻을 알겠고 말고/ 인간 행여 천기를 보게 할 수야[未出全身面 微呈一角奇 方知造化意 不欲露天機].”라고 하여 가야산에 깃든 천리를 표현하였다. 이는 가야산을 도체(道體)로 인식하고 있으며, 정구의 내면 의식과 수양론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1574~1655]은 중양절(重陽節)에 가야산 우두봉에 올라 시를 지었다. “9일 가야산 제1봉에 오르니/ 긴 하늘은 다함이 없고 생각 또한 끝이 없다네”라고 하며, 「9일 가야산 상봉에 올라 돌 위에 씀」을 지었다. 배상룡은 정구의 문하로, 성주의 강학 문화를 진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가야산 정상에서 배상룡은 ‘쾌활(快活)’을 느끼며, 우주의 진리와 그 마음을 증폭시켰다.
[가야산과 기행문]
가야산을 유람하고 기록으로 남긴 선비들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정구, 남계(柟溪) 이중무(李重茂)[1568~1629], 창주(滄洲) 허돈(許燉)[1586~1632], 죽헌(竹軒) 신필청(申必淸)[1647~1710],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1691~1767],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 농곡(農谷) 김명범(金明範)[1730~1808], 지애(芝厓) 정위(鄭煒)[1740~1811], 명암(明菴) 도우경(都禹璟)[1755~1813], 이호윤(李顥潤)[1827~1886] 등이다.
김일손은 “장차 영남(嶺南)을 유람할 때 최문창(崔文昌)[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 말의 뜻을 잃고 그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탐력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면서 그가 작고한 곳이 바로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점을 생각하였다.”라고 하여 최치원처럼 신선(神仙)과 은사(隱士)가 머무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정구는 가야산을 오르며, “공자(孔子)가 ‘인(仁)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말미암는 것이지, 남에게서 말미암겠는가.’라고 함이여! 오늘 여러분은 각자 서로 노력하고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후일 시야의 넓어짐은 바로 지금의 봉천대 정도가 아닐 것이다[信乎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今日諸君 各相努力 毋各怠焉 他日眼界之寬 非直今之奉天也].”라고 하였다. 정구는 가야산을 도체로 인식하고 있고, 유람 중에도 『근사록(近思錄)』,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 『주자연보(朱子年譜)』 등을 읽으며 심성을 수양하였다.
선비들은 가야산 산수 유람을 하면서 좋은 선경(仙境)을 만나면 피리 불고,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읊조리며 풍류(風流)를 즐겼다. 공자와 그 제자가 그러하였듯이, 이러한 풍류는 기상과 호연지기를 북돋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산수와 조화를 통해, 마음을 확 트이게 하고 뜻을 유연하게 만드는 기상을 함양시켰다.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에는 사림파(士林派)의 성장을 알 수 있는 인물 김종직·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및 동인(同人)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훗날 정구의 제자 및 영남의 선비들은 이들의 자취를 좇아 가야산을 찾아갔다. 더욱이 신필청은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서, “영남의 산수는 우리 동방의 우두머리이고/ 가야산의 경치는 또한 영남의 으뜸이 되어 매우 뛰어나며 아주 특별하여 이름이 높다[嶺南山水 冠吾東 伽倻形勝 又爲南嶺之最 擅魁偉絶特之名].”라고 하여 영남제일승경이라고 칭송하였다.
[가야산과 현대 문학]
가야산과 관련된 근대의 기행문은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신여성인 화가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 1938년에 발표한 마지막 글 「해인사의 풍광」이 대표적이다. 나혜석은 독실한 불교 신자답게 불교에 대한 생각을 깊게 이해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주 문학을 살펴보면 1960년대,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이농 행렬을 따라 도시로 출향한 사람들이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 준 고향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창작 활동으로 전개시켰다. 이런 시인들로 김태수·배창환·이일향·리강룡·문인수·박방희 등이 있다. 이들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 운동기에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시 세계를 구축하며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1980년대가 지나고 1990년대 이후에 등단한 시인은 김순란·문차숙·원무현·조선희·박근구[시조]·임호인 등이 있다. 2000년대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안용태·배정희·이기숙·김기자·장병훈·이윤경[동시]·서경숙[시조]·박덕희[동시] 등이 있다.
박근구는 「가야산 만물상」에서, “가야산 만물상은 비바람이 오랜 세월 다듬고 빚었기에 인간의 언어로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가야산 만물상에 대한 시인의 통찰력이 보인다. 만물상은 자연의 결과물이고,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박근구의 시 세계는 자연과 삶의 현실을 관조하며, 재치 있는 언어로 표현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배창환은 「겨울 가야산」·「가야산 이야기」·「가야산 시」·「가야산 생수」·「칠봉산」·「땅버들」 등의 가야산 관련 시를 썼다. 배창환은 「겨울 가야산」에서 “눈 덮인 가야산에 새벽 햇살 점점이 붉다/ 직선에 가까운, 굵은 먹을 주욱 그어/ 하늘 경계를 또렷이 판각하는 지금이/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정 장엄한 순간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배창환은 겨울의 가야산을 가장 장엄하게 보고 있다. 배창환은 그러한 가야산을 가장 닮아가고자 한다. 배창환은 교육과 관련된 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창작하며, 문학 교육의 실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생명과 삶의 길을 배워 가며,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가야산과 문화]
지금의 성주 팔경은 제1경 만물상, 제2경 독용산성, 제3경 회연서원, 제4경 포천 계곡, 제5경 성밖숲, 제6경 세종 대왕 자 태실, 제7경 한개 마을, 제8경 비닐하우스 들판으로 선정되어 있다. 성주 팔경에는 성주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현재가 교차하고 있으며 가야산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가야산의 산수는 성주의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를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가야산의 산수가 만들어 낸 성주 문화는 자비선사 템플 스테이와 심원사 템플 스테이가 있고, 가야산 역사 신화 공원·회연서원·성주 한개 마을 등의 전통적인 역사 공간이 있다. 가야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만물상·무흘구곡·포천 계곡 등이 상생과 소통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가야산이 품은 성주는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예컨대 2020년 처음으로 개최된 성주 성밖숲 희망길 “와숲”은 정신적 치유와 힐링 공간을 제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성밖숲은 산림청 주관 2017년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공존상[우수상]을 받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주관 2020 ‘언택트 관광지 100선’에 이름을 올렸다. 한여름 밤 아름답고 신비로운 숲속 빛의 향연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