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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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南最高-山城禿用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신태수 |
관련 지역 | 독용산성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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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영천리에 걸쳐 있는 수많은 영남 지역의 성 중 가장 규모가 큰 산성.
[개설]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영천리에 걸쳐 있는 독용산성(禿用山城)은 현존하는 수많은 영남 지역의 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양성지(梁誠之)가 『눌재집(訥齋集)』에서 조선을 ‘성곽(城廓)의 나라’라고 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성이 아주 많았다. 남한에서만도 1,300여 개가 넘는 성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다. 특히 산지가 국토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지형적 특성상 오래전부터 평지성(平地城)보다 산성이 발달했다. 독용산성도 가야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할 만큼 오래되고, 가장 높은 산성 중의 하나이다. 산성은 대개 성이 위치한 입지 조건이나 성벽이 자리 잡은 지형의 이용 방법을 기준으로 하여 산정식(山頂式)[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 복합식으로 구분되는데, 독용산성은 성 안에 한 개 이상의 계곡을 포함하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포곡식에 속한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형태가 포곡식이다. 한편 산성 축조에 유리한 지형으로 고로봉(栲栳峰), 산봉(蒜峰), 사모봉(紗帽峰), 마안봉(馬鞍峰) 등을 드는데, 독용산성이 자리 잡은 지형은 사모봉과 마안봉의 복합형이다.
[독용산성의 위치]
독용산성은 독용산(禿用山)[955m]의 정상 부근에 있다. 독용산은 소백산맥 주봉 중 하나인 수도산의 동북쪽 줄기와 가야산에서 두리봉·형제봉을 거쳐 뻗어 나온 줄기에 솟아 있다. 산성이 자리 잡은 곳은 독용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여러 산봉우리와 그 사이의 능선이 된다. 즉 동남쪽으로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말안장의 형태로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여러 산봉우리가 성벽을 둘러싸고 있고 성벽은 주로 가파른 절벽에 축조되어 있으며, 일부는 능선이 성벽을 이루기도 한다. 이에 비해 성 안은 평탄한 지형이 많이 분포한다. 독용산성의 위치를 나타내는 고지도로는 『지승(地乘)』[18세기 후반], 『1872년 지방지도』「독용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 등이 있다.
독용산은 현재의 성주읍을 중심으로 보면 성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독용산성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을 중의 하나인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 사더래 마을에서 도보로 성 안까지 약 3시간 걸린다. 문헌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는 서쪽으로 33리, 『성주목읍지』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각각 40리와 5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거리의 차이와 현재 성주읍에서 독용산성까지의 거리인 16.5㎞와 함께 비교해 볼 때, 이 정도 차이라면 기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범위 안이므로 독용산성의 위치는 동일하게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독용산은 성주에 서쪽으로 접한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독용산성은 성산가야 시기부터 성주의 서쪽 관문 역할을 할 만한 입지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독용산성의 내력]
독용산성의 ‘독용(禿用)’은 산봉우리가 뾰족하고 높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용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으나 성산가야 때로 본다. 이러한 추정은 성주가 김천, 합천, 거창, 구미 등지의 사이에 위치하고, 성산가야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러한 지리적·역사적 환경에서 원삼국 시대와 삼국 시대 초에 세력 간의 군사적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성주의 서쪽 산지는 일찍이 산성이 축조될 만한 곳이었다. 이는 성주에 산재한 고분군 중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와 성산동 등의 고분군에서 원삼국 시대와 삼국 시대 초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 데서 확인된다. 한편 독용산성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독용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야 나타나지만, 간접적인 기록은 삼국 시대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新羅本紀)」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18년조와 권24 「백제본기(百濟本紀)」 근초고왕(近肖古王) 28년조에 ‘독산성(禿山城)’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이 373년에 일어난 사건에 독산성이 등장하는데, 당시 삼국 시대의 정세와 성주 고분의 고고학적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현재의 독용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신라본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7세기 백제와 신라의 싸움에서도 독산성이 나온다. 한자로 ‘獨山城’이기는 하나 성주의 독용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시대 고지리지에 나타나는 독용산성의 설명은 위치와 규모, 개축 시기 등에 대해 알려준다. 임진왜란 때 피란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하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독용산성은 성주 33리에 있고 석축으로 주위 1만 3064척이고 지금은 반이 퇴락되었으며 안에 샘 3개소, 연못 1개소가 있다[秀用山域在星州三十三里 石築周一萬三千六十四尺 今半類落 內有泉三池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로 『성산지(星山誌)』[1677], 『동국여지지』[17세기], 『여지도서』[1757~1765], 『성주목읍지』[1832], 『경산지』[1859], 『대동지지』[1864], 『증보문헌비고』[1908], 『성주지(星州誌)』[1931] 등에 나타난다. 한편 성주군수로 짐작되는 이용화(李龍和)가 1888년에 지은 「독용진중수기(禿用鎭重修記)」가 전한다.
『여지도서』, 『성산지』,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1675년(숙종 1)에 독용산성을 개축(改築)한 과정과 성 안의 주요 시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개축할 당시의 둘레는 4,581보(步)이고, 여장(女墻)[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은 2,405첩(堞)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동옹성(東瓮城)·장대(將臺)가 있고, 사방에 포루(砲樓)가 한 개씩, 동문(東門)·수구문(水溝門)·남소문(南小門) 등이 있었다고 나타난다. 또한 읍성의 요소인 객사(客舍)·창고·군기고(軍器庫)·사찰 등이 있었고, 합천, 거창의 병사와 군량미가 배속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다른 산성과 함께 보수가 필요하다는 상소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독용산성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되고 있었던 듯하다.
[독용산성의 현황]
독용산성은 조선 말에 이르러 군사적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깊고 높은 산중에 있는 독용산성은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성의 시설이 대부분 퇴락했다. 성벽이 많이 허물어지고 성문지(城門址)도 동문과 남소문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발굴 조사에서 쇠도끼·쇠창·쇠화살·삼지창·말안장·갑옷 등이 군기고(軍器庫)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그후 독용산성을 정비하고 복원하기 위한 정밀 지표 조사가 1992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동문과 남소문 외에 서문지·북문지·남문지, 암문(暗門) 3개소, 간문(間門) 2개소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 치성(雉城)의 말단부에는 포루(砲樓), 망루(望樓), 장대(將臺)로 추정되는 유지(遺地)가 확인되었고, 성 안에는 객사지(客舍址)와 군기고, 창고 터와 안국사지(安國寺址) 등이 조사되었다.
이때 실측 결과 독용산성은 둘레가 7.4㎞이고 높이는 2.5m이며 성벽의 폭은 평균 1.5m, 성 안 면적은 1.18㎢임이 밝혀졌다. 이 가운데 둘레는 지리지에 나와 있는 독용산성에 대한 정보와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의 지리지에는 둘레가 1만 3064척 혹은 4,581보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 길이는 7~8㎞로 계산되니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규모는 테뫼식 곧 산정식(山頂式) 산성보다 훨씬 큰데 포곡식 산성의 경우가 대개 그러하다. 독용산성 또한 포곡식으로서 계곡을 끼고 있기 때문에 성 안에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어 장기전에 유리하다. 피란처로 알맞고 성 안에 많은 병사와 말들이 주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용산성의 축조 방법은 대부분 전통적인 성벽 쌓기 방식이다. 먼저, 지형에 따라 협축법(夾築法)과 내탁법(內托法)이 섞여 있고, 급격한 경사 중 세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동쪽 성벽은 주로 협축법이 사용되었으며, 급경사에는 가로로 단계식으로 성벽이 쌓여 있다. 또한 직선형 성벽과 곡선형 성벽이 복합되어 있으니 지형을 활용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석축(石築)된 성벽은 산에 있는 돌들로 막돌흩은층쌓기가 되어 있고, 그 사이 틈에는 잔돌끼움쌓기가 되어 있다. 나아가 동문지, 남문지의 성문 좌우에는 무사석(武砂石)을 이용한 다듬은돌바른층쌓기로 성체(城體)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독용산성의 특징은 외성(外城)은 돌로 쌓고 성 안 5~8m의 폭으로 성 안에 평평한 길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높이 2~3m의 토성(土城)을 축조한 점이다.
독용산성에는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인 치성도 발견된다. 치성은 대체로 굴곡이 심한 산세의 지형을 이용해 축성되는데, 본성(本城)에서 돌출된 곡성(曲城)으로서 성 가까이 접근하거나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치(雉)’라고도 하는 이 성은 방어에 매우 유효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성에는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 독용산성에는 동쪽과 서쪽에서 뻗어나간 능선 위에 두 개의 치성이 있었고, 치성의 끝부분은 평평하고 둥근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망루와 같은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서쪽의 치성은 전략적으로 독용산의 정상보다 높은 성 밖의 산봉우리까지 성을 연결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물과 관련된 유구(遺構)는 연못 4개소, 샘 2개소, 계곡 세 군데가 조사되었다. 연못 한 곳은 흔적이 거의 없으나, 남아 있는 세 곳 중 두 곳은 중앙에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해 수원(水源)을 확보하고 경관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성 안에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배능헌 불망비(裝能憲不忘碑), 이용화 선정비(季龍和善政碑), 이승무 선정비(季承譕善政碑), 장천학 선정비(張天鶴善政碑), 박시연 선정비(朴時演善政碑) 등이 확인되었다. 이 비석들은 관리의 치적을 기리는 선정비들이다.
[독용산성의 복원과 관광 자원으로서의 활용]
1995년 1월 1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독용산성은 두 차례의 지표 조사를 거쳐 일부가 복원되고 전체적으로 정비되어 있다. 복원된 시설은 동문과 일부 성벽으로서 동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문루(門樓)가 세워진 형태로 ‘관성루(觀星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문을 들어서면 선정비 5기가 나란히 서 있다. 성벽은 기존에 성을 쌓았던 돌과 새로 깎은 돌을 섞어 군데군데 복원되어 있다. 현재 독용산성에 가보면 동문 방향 외에도 서쪽·남쪽·북쪽의 성문과 포루·망루의 자취와 그 외 여러 시설과 건물의 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숲길 옆에 벽진 이씨 시조인 이총언(李悤言)을 기리는 벽진장군대첩비(碧珍將軍大捷碑)가 서 있다.
독용산성의 육각형 정자 전망대에 오르면 장관이 펼쳐진다. 발 아래 성주 댐이 푸른 빛으로 들어오고 멀리 가야산과 대덕산이 눈앞에 다가온다. 독용산성은 성주 12경 중 10경으로서 특히 가을의 경치가 뛰어나고 숲이 우거져 공기가 청정하다. 이에 독용산성 자연휴양림이 조성·운영되고 있고 경관이 수려한 성주호에는 수상 레저 테마 파크인 아라 월드가 개발되어 있다. 가야산 산수길 중 성주호 둘레길에는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독용산성은 이들과 함께 자연·휴양의 공간이고 산림 휴양과 수상 레포츠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복합 휴양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 독용산성의 성벽 앞까지 임도(林道)가 나 있고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승용차로 오를 수 있다. 앞으로 독용산성이라는 콘텐츠가 지닌 관광 자원으로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산성에 이르는 접근성을 보완하고 성 안의 시설을 이용한 둘레길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즉, 현재의 임도를 좀더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수하고, 성 안 시설인 연못을 복원하고 일부 성벽에 한정된 성벽길[回廓道]의 복원을 확대한다면 독용산성의 경관이 다채로워지고 탐방객들에게 더욱 다양한 경험의 요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