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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38
한자 生命文化-象徵世宗大王子胎室
영어공식명칭 Symbol of Life Culture - Placenta Chambers for King Sejong's Son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심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38~1442년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조성
관련 지역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태봉에 조성된 세종 대왕의 18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실.

[개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은 1438(세종 20)~1442년(세종 24)에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태봉(胎峰)에 조성된 세종 대왕의 18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실(胎室)이다. 조선 전기 태실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다수의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이다. 더불어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보이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염원]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아기가 태어나면 태(胎)를 갈무리하는 장태 문화(藏胎文化)가 있었다. 장태 습속은 태를 불에 태우거나[燒胎], 태를 땅에 묻거나[埋胎], 태를 물에 흘려보내거나[水胎], 태를 말려서 보관하는 것[乾胎] 등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그중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하게 태실(胎室)을 조성하는 독창적인 문화가 왕실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태실 중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징이 경상북도 성주에 있다. 바로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이 그것인데, 이는 생명 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희귀하고 독보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종대왕자 태실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은 생(生)-활(活)-사(死)로 진행되는데, 모두 생명 문화에서 출발하며 생의 구체적인 유산이 바로 ‘태실’로 생명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태는 아이와 함께 소중히 다루어야 할 생명체[분신]이며 근원이라는 인식에서 소중히 갈무리하였다. 이러한 장태 문화는 어느 특정 지역 문화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과 유럽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풍속이다. 태를 갈무리하는 것은 아이의 평안,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미래를 향한 염원이었으며, 생명에 대한 존중과 염원이 담긴 ‘생명 존중 사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생명 존중 사상이 우리나라에서만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왕실에서 명당과 길지(吉地)에 태를 묻고 태실을 조성하여 세계 유일의 문화로 발전하였다.

[태실이 가장 많은 성주]

태실을 설치하는 곳의 풍수적 입지 조건은 『태봉등록(胎封謄錄)』 1662년(현종 3) 2월 초 1일에 의하면, “무릇 태봉은 산꼭대기[山頂]에 쓰는 것이 예(例)이다. 원무(元武)[玄武]는 없으며, 내맥, 좌청룡, 우백호, 안대(案對)[案山]를 살펴서 택하는 것이라고 한다[凡胎峯例用於山頂元無來脈龍虎案對看擇之事云]”라 하였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돌혈(突穴)에 해당되는 곳으로 맥이 비룡상천(飛龍上天)하여 산 정상에 생기(生氣)가 가득하여 이 기를 받기 위해 이러한 곳에 태실을 설치한다. 조선 왕실은 전국에서 이러한 길지(吉地)를 찾아 태실을 조성하였다.

특히 성주에는 세종대왕자 태실, 태종 태실, 단종 태실 등 21기의 태실이 조성되었다. 이중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18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또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태실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는 태실 유적이다. 이 태실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胎室)’로 1975년 12월 30일 지정되었다가 2003년 3월 6일 사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로 승격되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동북쪽의 선석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태봉[해발 258.2m]의 정상에 있다. 주위로는 세천이 태봉의 좌우에서 흘러 앞쪽으로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태실 주변의 사신사가 잘 갖추어져 있어 돌혈의 형국에 해당되는 명당이다. 또 동쪽에는 태실 수호 사찰인 선석사(禪石寺)가 아직도 위치하고 있다. 이 태실 주변에는 원래 성주 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으나 지관이 길지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1438년~1442년 사이에 19기의 태실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선석산 태봉의 정상은 동-서로 길게 평탄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대군 7기, 군 11기, 원손[단종] 1기 등 총 19기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각 태실은 앞뒤 두 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앞줄은 동쪽에서부터 화의군, 계양군, 의창군, 한남군, 밀성군, 수춘군, 익현군, 영풍군, 왕자 장[영해군], 왕자 거, 왕자 당의 순으로 11기의 태실이 위치하고, 뒷줄은 동쪽에서부터 진양대군,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흥대군의 순으로 7기의 태실이 위치하며, 이 뒷줄에서 서북쪽에 원손[단종] 태실이 있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다섯 왕자의 경우 태실 석물이 파괴되어 있다. 특히 세조 태실은 세조가 즉위한 이후 자기의 아기 태실에 가봉비(加封碑)를 세웠다. 1977년 이곳 태실을 보수 정비하던 중 태를 넣었던 태호(胎壺)와 태지석(胎誌石) 등이 일부 발견되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加封胎室)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데, 가봉 태실은 세조 태실뿐이다. 이들 태실의 구조를 살펴보면, 지상에는 개첨석·중동석·사방석으로 이루어진 중앙 태석이 놓이고 그 앞에 아기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세조 태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이 함께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아기 태실에다 가봉비만 설치하고 다른 가봉 태실처럼 팔각 난간석은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에는 태호와 태지석을 봉안한 방형의 태함이 매설되었다. 특히 태함에 안치된 태호는 내호(內壺)와 외호(外壺) 이중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맨 밑에 대접을 두고 그 위에 작은 호(壺)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큰 대접으로 전체를 덮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는 지상의 중앙 태석처럼 왕(王)을 나타냄과 동시에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조선 왕실에서 왕의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壺]에 넣어 산실 내의 길(吉)한 쪽에 둔다. 그리고 3일이 지난 후 7일 안에 세태일(洗胎日)을 정해서 태를 백 번이나 정성 드려 씻은 다음 약제로 처리한다. 태를 담은 작은 항아리[內壺]의 안 바닥 가운데에 동전 1개를 글자가 있는 면을 위로 향하게 하여 놓은 후, 씻은 태를 내호에 담고 유지(油紙)와 비단 보자기로 내호를 싼다. 이를 다시 큰 항아리[外壺]에 넣고 내호와 외호 사이의 빈 공간에는 솜을 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완성된 태호를 장태일(藏胎日)까지 길한 방향[吉方]에 보관한다. 이후 장태를 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날짜를 가려 태실을 조성한다.

태를 묻기 위해 관상감(觀象監)에서 태를 봉안(奉安)할 장소와 길일(吉日)을 선택하고 태의 봉송(奉送) 및 태실지의 개기(開基)와 봉토(封土)의 날을 가려 정한다. 장태일의 택일은 일정한 규율에 따르는데, 『태장경』에 의하면 장태하는 시기는 3월, 5월, 3년, 5년, 7년, 15년이라 규정하였는데, 이 숫자는 모두 길한 숫자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修治)하고 역사(役事)에 지장이 없도록 준비한다. 이때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또는 풍수학 제조(風水學提調)는 장태할 태실지를 선정하며, 안태사(安胎使)는 안태와 봉송의 책임을 맡는다.

장태일이 결정되면 태를 봉송하는데, 정해진 지역까지 30~40여 명의 악대와 관리가 참여하여 옮기게 된다. 안태사가 지나가는 고을에서는 채붕(彩棚)을 세우고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며, 군용(軍容)의 위의를 갖추어 안태사 일행을 맞이한다. 태실의 선정과 조성 순서는 장태처(藏胎處)의 비망(備望), 장태 길일의 선정, 잡물의 준비, 도로의 수선(修繕), 시역(始役), 개기(開基), 발태(發胎), 봉토(封土)의 순으로 일을 진행한다. 또 토지신에게 태의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봉안 의식도 거행한다.

이렇게 조성되는 태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된다. 아기 태실은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 조성되는 태실을 말하며, 태주(胎主)가 왕이나 왕비로 등극하면 아기 태실에 석물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가봉하는데 이를 가봉 태실이라 한다. 아기 태실의 구조는, 지하에 구덩이[土壙]를 파고 그 안에 태함을 안치하고 흙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 위 지상에는 반구형의 봉토를 쌓고 그 앞에 아기비를 세운다. 태함 안에는 이중 태호[내외호]를 안치하고 태호 앞에 글자가 있는 면을 태호로 향하게 하여 태지석을 세운다.

가봉 태실의 구조는, 아기 태실의 지상에 있는 봉토를 없애고 그 자리 가운데에 중앙 태석을 안치하고 바닥에는 돌을 깔고 주변으로는 팔각형의 난간대를 돌려 화려하게 치장한다. 기존 아기비는 주변 깨끗한 곳에 묻고 귀부와 이수로 된 가봉비를 세운다. 그리고 태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서남북 사방에 금표비(禁標碑)를 설치하고 금표 지역 밖에는 화소(火巢)[산불을 막기 위하여 능원, 묘 따위의 울타리 밖에 있는 나무나 풀을 불살라 버린 곳] 지역을 설정한다. 또 태실을 수호하는 관원을 배치하고 수호 사찰도 지정하여 관리하게 한다.

[성주 태실의 독자성과 현황]

성주 지역에는 특이하게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태실이 두 곳이나 위치한다. 특히 단종 가봉 태실은 그동안 경상북도 성주 법림산(法林山)과 경상남도 사천 소곡산 두 곳에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성주의 태실이 진짜 단종 가봉 태실로 밝혀지고 사천의 태실은 조선 제8대 임금인 예종의 장남인 인성 대군의 아기 태실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사천의 태실은 아직까지 수정되지 않고 ‘단종 태실지(端宗胎室地)’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1975. 2. 12.]되어 오고 있어 안타깝다. 현재 단종 가봉 태실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11-1번지에 위치한다. 그러나 최초의 단종 아기 태실은 선석산 태봉의 정상에 있는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내에 다른 18기 태실들과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의 기록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가) 풍수학에서 아뢰기를, “ … 지금 왕세자[단종]의 태실이 성주의 여러 대군들의 태실 옆에 기울어져 보토(補土)한 곳에 있으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태경(胎經)』[『태장경』을 지칭]의 땅을 가리는 법에 의하여 길지를 경기와 하삼도에 널리 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문종실록』 1450년 9월 8일]

나) 안태사 예조판서 허후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제 동궁[단종]의 태실을 성주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을 정하였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600보, 서쪽을 9,590보, 북쪽을 470보로 하여 표를 세우고, 또 품관 이효진 등 8명과 백성 김도지 등 6명을 정하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문종실록』 1451년 3월 6일]

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주 선석산에 주상[세조]의 태실을 봉안하였으나, 여러 대군과 여러 군과 난신(亂臣) 유[금성대군]의 태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법림산에 노산군[단종]의 태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태실을 옮기고 유와 노산군의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1458년 7월 8일]

위 가), 나), 다)의 기록을 살펴보면, 단종의 아기 태실[1차]은 원손일 때 1441년 선석산 태봉에 조성되었으며, 왕세자가 되어서는 1451년 가야산 내 법림산으로 옮기고[2차] 인근에 있던 법림사를 수호 사찰로 삼았다. 이후 단종이 임금에 즉위한 후 관례에 따라 재위 기간[1452. 5.~1455. 윤6.] 중에 가봉된다. 그러나 노산군이 된 이후 1458년(세조 4)에 가봉 태실이 철거되었다. 즉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태실까지 철거되었던 것이다. 또한 세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한 안평 대군, 금성 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5기의 태실까지 철거하였다. 지금 세종대왕자 태실에 있는 단종 아기 태실[1차]은 1977년 보수 정비 때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고 재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법림산의 단종 태실지에는 임금의 태실에서만 확인되는 가봉 석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발견되는데, 이는 아기 태실이 가봉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며, 세조에 의해 단종 가봉 태실이 철거되어 훼손된 흔적이라 하겠다.

[왜 성주에 태실을?]

성주군의 지세를 살펴보면, 남서부의 가야산[1,430m]을 비롯하여 서부와 북부에는 형제봉[1,022m], 독용산[956m], 염속산[870m], 백마산[716m], 영암산[782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동부와 남부에는 도고산[349m], 영취산[332m], 작산[532m] 등 비교적 낮은 산이 분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대가천(大伽川)이 서북부의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군의 서부를 동남류하여 고령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하고 있으며, 그 주변은 넓은 평야를 이루어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형을 갖춘 성주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명당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조선 시대 일찍부터 왕실의 주목을 받아 태실이 조성되었던 것 같다. 태실은 『육안태(六安胎)』와 『안태서(安胎書)』에 의하면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높고 고요하고 정결한 곳에 설치하는데, 이러한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돌혈(突穴)이라 하며 명당으로 여긴다. 그래서 태실이 있는 태봉산은 주산을 뒤로 하고 주위로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산줄기가 감싸며, 앞에는 물이 흐르고 안산(案山)[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이 있는 형국을 하여 길지에 해당된다. 특히 세종대왕자 태실선석산[해발 742.4m]을 주산으로 하여 뻗어 내린 지맥의 끝에서 솟아오른 돌혈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명당자리이다. 또 태봉의 정상은 동-서로 약 50m 규모의 평탄지를 형성하여 전국에서 가장 큰 혈장(穴場)을 하였다. 이외에도 성주에는 태종 태실단종 태실이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21기의 태실이 존재한다. 이는 조선 왕실의 태실이 정립되어 가는 초기부터 성주 지역에 많은 태실이 조성됨으로 인해 전국 명당 중 으뜸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생명 문화의 상징으로서의 태실의 문화 콘텐츠 방향]

최근 들어와 세계 유산은 각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 유산은 문화유산, 자연 유산, 복합 유산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전통문화 중 조선 왕실의 3대 문화인 궁궐[종묘], 왕릉, 태실 중에 종묘와 왕릉은 이미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유산[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 유산은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그 핵심인데, 우리나라 태실은 생명 문화의 상징으로 세계보편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만이 가지는 독특한 희귀성을 갖고 있어 탁월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태실에 대해 지속적인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세종대왕자 태실은 전국 태실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기의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보존도 잘되어 있어 진정성이 확보된다. 여기에 조선의 왕이나 왕비의 가봉 태실까지 포함하여 함께 등재를 추진한다면 완전성도 더욱 확보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동안 성주군은 세종대왕자 태실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학술 대회를 개최하고 자료집 발간, 생명 문화 전시관을 비롯한 태실 생명 문화 공원 조성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성주 생명 문화 축제까지 개최하여 일반인들에게 생명 문화를 홍보하고 있다. 생명 문화란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그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문화로, 이러한 문화가 성주에는 융합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즉 성주에는 생명의 태어남을 상징하는 태실, 인간이 성장하고 삶을 영위하는 공간인 한개 마을, 죽음의 영역을 상징하는 성산동 고분군을 지역 문화 콘텐츠로 개발하여 세종대왕자 태실의 태 봉안 재현 행사, 생명과 탄생, 장태 문화 등 태실과 관련된 것을 축제의 주 구성 요소로 삼아 지역 축제의 브랜드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가 이러한 계승으로 인해 현대에도 생명 문화 존중 사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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