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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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伽倻山錄 |
영어공식명칭 | Records of Playing on Gayasan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종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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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구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79년 - 「유가야산록」 저술 |
배경 지역 | 가야산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유산기(遊山記) |
작가 | 정구 |
[정의]
1579년 성주 출신 문신인 정구가 가야산 유람 여정을 기록한 일기체의 기행문.
[개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등 4인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경험한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정구의 가야산 유람은 심학(心學)과 예학(禮學)을 발현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유람자와의 대화 및 기록에서 심성 수양과 정구의 학문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구성]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은 6,420여 자로, 정구가 1579년(선조 12) 9월 10일부터 24일까지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이다. 정구의 여정은 대체적으로 계숙~한강~율현~심원사~홍류동~해인사~학사대~내원사~상소리암~봉천대~제1봉~해인사~심원사~입암~사인암~증산~한강정사~계숙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용]
정구는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광해군 집권 초기에 퇴계학파에 편향되었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성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두 학파를 융합할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 성주 일대는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 의해 한려학파(寒旅學派)가 형성되었다. 정구와 장현광은 영남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정구는 서울 출신의 관설(觀雪) 허후(許厚)[1588~1661],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을 제자로 두어, 정구의 학통이 영남의 장현광과 근기 지방의 허목으로 계승되었다.
「유가야산록」에는 이러한 정구의 학문과 사상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일상과 유람을 통해 정구의 인간적인 진면목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즉 정구는 가야산을 천기(天機)로 인식하며 가야산을 유람하였다. 조물주의 뜻을 이해하며 산수 유람을 하였다. 그리고 배낭에 『근사록(近思錄)』,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 『주자연보(朱子年譜)』 등을 넣고 다니며 자주 읽었다. 주자를 존숭하는 마음과 성현의 심학을 발현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특징]
정구는 「유가야산록」에서 산수 유람을 선과 악에 비유하면서 동인(同人)들에게 성정 도야를 권고하였다. 특히 산수 유람을 하면서 공자·맹자·주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정구는 자기 스스로 다짐할 뿐만 아니라, 동인에게 성찰의 말을 하며 성현의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정구는 가야산의 산하에 천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숙야재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의 시가 그것이다. “전신의 참모습을 아니 내놓고, 기묘한 한 꼭대기 살짝 드러내. 조물주 숨은 뜻을 알겠고말고, 인간 행여 천기를 보게 할 수야.”라고 하였다. 정구는 가야산에 함의된 천리를 인식하며 산수 유람을 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정구는 산수 유람을 하면서 직접 독서를 하였다. 즉 주자의 「운곡기(雲谷記)」를 읽으며 심성을 도야하고, 그 깨달음을 얻어 선현과 함께 노닐고 있는 듯한 정서를 느끼고 있었다. 심학의 대가인 정구는 이러한 마음을 통해 성현이 되고자 하였다. 정구의 『심경발휘(心經發揮)』 서문에서 그 실천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정구의 가야산 유람은 이후 전범이 되고 유람의 여정과 정구의 유적은 탐방하는 코스로 활용된다. 특히 가야산, 수도산 일대 정구의 유적은 꼭 유람해야 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컨대 후손 지애(芝厓) 정위(鄭煒)[1740~1811]는 정구의 유람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가야산을 인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