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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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所 |
영어공식명칭 | Neokbawi Gongso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1길 11-5[무학리 17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에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가천성당 소속 공소.
[설립 목적]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 넉바위마을에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병인박해 때 충청도 황간에서 김상연[경희] 가정이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로 피난 와 살게 되면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1888년경 경상남도 밀양 정승골에 살던 장안방 마태오[성주 출신 장태식 신부의 조부] 가정이 정착하면서 넉바위공소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독용산 아래 조리골 동쪽인 넉바위 뒷골에 모여 살았으나 1890년대 말에는 현재 공소가 있는 넉바위에 정착해서 살았다. 1885년경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공소에 와서 18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1895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낙산[가실]성당이 설립된 이후에는 낙산성당 관할 공소로서 유지되었다. 당시 교세 통계를 보면 1895년 당시 33명이었던 신자 수가 이듬해 91명으로 증가하였다. 1910년에는 56명이었다.
1921년 11월 11일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대구를 떠나 김천·성주 지역 공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넉바위공소를 방문하였다. 주교는 일기를 통해 “공소는 볼품없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나는 여기서 아주 잘 교육받은 어린 견진자들을 만났다. 한국 나이로는 7세이고 실제는 6세인 어린 소년이 교리 문답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9세 내지 10세 된 다른 소년들은 [문답의] 풀림까지 알고 있었다. 여기도 또한 매우 가난한 곳이다. 한 어린 견진자는 정말 꼭 필요한 옷들인 누덕누덕 기운 바지와 조끼밖에 없어서 솜도 두지 않은 이 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1936년 여름 대홍수 때 공소 건물과 자료가 유실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활발하게 운영되어, 1950년 성주성당에 소속되었다가 1960년 가천성당 설립을 계기로 소속이 바뀌었다. 장안방 마태오의 집에서 주일 미사를 보다가 1962년 현재의 건물을 완공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소속 본당 신부가 방문하여 성찬의 전례가 없는 미사를 집행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현황]
1990년 8세대 26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현재 2가구 4명의 신자에 의해 공소가 유지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넉바위공소는 성주 지역 초기 천주교사와 관련된 중요한 공소로서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