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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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法水寺- |
영어공식명칭 | Site of Beoupsusa Temple |
이칭/별칭 | 법수사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권기현 |
건립 시기/일시 | 802년 - 금당사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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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5년 12월 30일 - 법수사지 당간지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0년 7월 5일 -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 지정 |
최초 건립지 | 금당사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 |
현 소재지 | 법수사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 |
성격 | 절터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
[변천]
법수사(法水寺)는 통일 신라 시대인 802년(애장왕 3)에 창건된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금당사(金塘寺)라고 불렀다. 이후 고려 시대에 중창하여 법수사로 개칭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의 거찰인 금당사는 승려 의상(義湘)[625~702]의 법증손인 승려 이정(利貞)이 화엄 십찰(華嚴十刹)의 한 곳으로 창건하여, 해인사(海印寺)와 더불어 성주 지방 불교의 진원지로 존재하였다. 창건 당시 금당사의 규모는 황룡사(皇龍寺) 다음가는 대규모 사찰이었는데, 규모가 큰 편인 해인사와 비교해도 3배~4배가 더 큰 대화엄종찰이었다. 이러한 규모의 불사는 왕실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당시 애장왕 황태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해인사 불사를 마무리하고 금당사 창건 불사를 시작하였을 때, 애장왕이 친히 참배하고 전답 2,500결을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사적기에 있다. 대가람이 성주 지역에 창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라 시대 성주의 불교계 위상과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한때는 당우가 구금당, 팔종각 등 총 1,000칸이 넘고 부속 암자가 100여 개였으나 지금은 도은암과 보현암, 백운암, 일요암 등 몇 개의 암자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敬順王)의 작은 왕자 범공이 승려가 되어 금당사에 머물렀다.
고려 시대에는 사찰을 중창하여 명칭을 법수사로 바꾸었다. 고려 시대의 승려 균여(均如)[923~973]가 30세에 법수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분열된 화엄 교단을 하나로 통합하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달래며, 또한 화엄의 교의로 교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화엄의 진원지인 법수사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법수사는 균여를 북악계의 승려라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맞이하였다. 이후 균여는 북악파의 종주인 승려 희랑(希郞)을 만나 남북 화엄을 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법수사는 균여를 통해 갈라진 화엄 교단을 회통시킨 곳이고, 후삼국 통일 이후 갈라진 민심을 화합한 곳이며, 또 민중의 감정을 달래기 위하여 화엄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구상한 곳으로 민족 화합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또한 1114년(예종 9)에 왕사 낙진(樂眞)[1045~1114]이 법수사의 주지를 지냈을 정도로 고려 시대까지 국가에서 중요한 사찰이었다.
이후 조선 시대에도 계속해서 법수사를 중심으로 수행과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으나, 1409년(태종 9) 태풍과 폭우로 사역(寺域)의 7할 이상이 유실된 후 중창하지 못하고 쇠락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법수사의 젊은 승려들이 산성 축성 공사에 동원되어 활기를 잃었고, 1633년(인조 11)에 또다시 태풍에 의해 남은 사역까지도 완전히 기울어졌다. 이후 17년 뒤인 1650년(효종 1)에 소규모로 중창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1677년(숙종 3) 성주 지역에서 간행된 책 『경산지(京山志)』에는 법수사가 금당 9동, 종각 8동 등이 있는 1,000칸 규모의 대사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법수사 터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번지, 가야산 남쪽 중기(中基) 마을에 있다. ‘중기’는 절터 중앙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황]
법수사 터는 폐사지로 일부 기록과 흔적만 남아 있으며, 절터에 남아 있는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法水寺址三層石塔)을 2010년 7월 5일에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사찰 창건 당시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높이 6m에 2층 기단과 3층의 탑신이 있다. 법수사지 당간지주(法水寺址幢竿支柱)는 괘불을 걸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1975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특이한 유물로는 시식대(施食臺)가 있다. 시식대는 재 의식에 쓰던 유물로, 영혼을 천도한 뒤 마지막으로 잡귀들을 위해 밥을 먹이고 경전을 읽어 주는 도구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크기는 가로가 1.5m, 세로가 90㎝, 높이가 80㎝이다. 윗면 중앙에 지름 30㎝의 연화문(蓮花紋)이 양각되어 있다.
금당사 중창 시 사찰에 있던 삼존 불상은 인근 용기사(用起寺)로 옮겼으나, 용기사마저 폐사되자 1897년(고종 34)에 범운이 지금의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陜川海印寺大寂光殿)[경상남도 유형 문화재]으로 이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법수사 뒤편 용기 골짜기로 들어가는 어귀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도 1967년에 경북대학교로 이운하여 보존하고 있다. 진등 마을에 있던 목 없는 석불 좌상은 대좌와 함께 백운초등학교에서 보관 중이다.
[의의와 평가]
법수사의 운명은 성주의 불교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의 삼존 불상을 보면 법수사의 영광과 더불어 성주군의 화려하였던 불교를 추정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현재까지 귀중한 불교 문화유산들이 관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