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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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感應寺 |
영어공식명칭 | Gameungsa |
이칭/별칭 | 성주 감응사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기관 단체/사찰,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길 234[대산리 5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기현 |
건립 시기/일시 | 802년 - 감응암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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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중창 시기/일시 | 1675년 - 감응사 중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740년 - 감응사 중수[1740년]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780년 - 감응사 재중수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21년 - 감응사 중수[1921년]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70년대 - 감응사 대웅전 중수 |
최초 건립지 | 감응암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길 234[대산리 56] |
현 소재지 | 감응사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길 234[대산리 56]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체징 |
전화 | 054-931-1825|054-932-9447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감응사(感應寺)의 창건 설화는 다음과 같다. 애장왕(哀莊王)[788~809]이 늘그막에 왕자를 낳았는데 왕자는 날 때부터 눈이 나빠 앞을 볼 수 없었다.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왕비는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도인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아침 문 앞에 독수리가 나타날 것이다. 그 독수리를 따라가면 약수가 있는 곳에 이른다. 그 약수로 눈을 씻고 약수를 마시면 눈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도인의 말대로 왕비가 독수리를 따라가니 과연 약수가 있었고, 약수로 왕자의 눈을 씻고 마시게 하였더니 눈병이 나았다. 애장왕은 이를 부처의 은덕으로 여겨 약수 앞에 감응사를 세우고,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신령스러운 독수리 산이라는 뜻에서 영취산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대웅전(大雄殿) 뒤쪽 암벽[일명 약수 바위] 하단에는 약수가 솟는 옥류정이 있고 지금도 물맛이 차고 달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주위 암벽에는 글씨들이 많이 새겨 있다. 약수 상단의 부조에는 용왕상이 새겨 있다. 여타 사찰의 삼성각(三聖閣)에서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모시는 데 반해, 감응사에서는 독성 존자(獨聖尊者) 대신 약수 바위의 ‘용왕신’으로 추정되는 상을 부조로 모시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감응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보조 국사 체징이 창건하였다. 체징이 창건할 당시 사찰명은 감응암이었다. 창건 이후 수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675년(숙종 1)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 16)에 중수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재중수하였다. 1921년에 이상진이 또다시 중수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 승려 평타가 신도들의 시주로 대웅전을 중수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활동 사항]
감응사는 성주 한개 마을의 주민들에 의하여 계속 중시되었고, 이씨가 성주 한개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 이씨 산방(李氏山坊)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마을에서 사찰을 계속 중수하고 지원을 베풀었던 까닭은 그곳이 수양하기 좋은 자리였고, 여름에 시원하고 경치와 전망이 좋아서 정신이 맑아지고 공부에 의욕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부처와 승려에 대한 경외감과 신앙심 때문에 사찰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마을 청년들의 공부방으로서 기능하면서 중수를 거듭한 것이다. 감응사는 동화사의 말사가 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성주 한개 마을의 지원으로 유지되었으며, 동화사의 말사가 된 이후부터 성주군 불교 포교의 중심 사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1970년에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웅전과 삼성각, 범종각(梵鐘閣), 영선원, 봉래당, 요사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