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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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공식명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기현 |
[정의]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개설]
성주군은 경상북도 서부에 있고, 남쪽으로는 해인사(海印寺)가 있는 경상남도 합천군과 고령군에 접해 있고 동쪽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칠곡군과 대구광역시, 서쪽으로는 직지사(直指寺)가 있는 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성주의 지세는 서고동저의 산세에 두 줄기의 큰 하천인 대가천(大伽川)과 이천(利川)이 관류해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서쪽 경계의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伽倻山)[1,433m]의 준령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는 가천면 형제봉[1,022m]과 독용산[956m], 금수면 염속산[870m], 초전면 백마산[715m] 등이 각 지역의 고지대 주령(主嶺)을 형성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서진산, 도고산, 영취산, 작산 등의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그 중앙에 여러 지류들이 낙동강으로 합해져 타원형의 분지 형태를 이룬다. 이와 같이 성주는 경상도의 중심으로서 곳곳에 비옥한 퇴적 평야를 형성하여 일찍부터 정착 생활을 하기에 최적의 지리적 환경을 갖춘 지역이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삼한 시대에는 성산가야의 모체로 반파국이 있었을 것으로 비정된다. 성산가야는 6세기 중엽에 신라에 편입되며 본피현(本彼縣)이 되었다. 757년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성산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나중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에서는 940년(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는데, 그 뒤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쳐 1308년(충렬왕 34)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1616년(광해군 8) 신안현(新安縣)으로 개명되었다가 1745년(영조 21) 다시 성주목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성주군이 되어 별다른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주 지역 불교문화]
경상북도 성주는 일찍이 가야,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불교문화가 융성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가야산에 해인사가 있어 가야산이 경상남도 합천군의 주산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 가야산은 성주의 진산이다. 가야산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법수사(法水寺) 터는 성주 지역 사람들이 이룩한 신라 시대 불교문화의 저력이자 폐사지(廢寺址)가 보여 주는 미학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은 고려 시대 이래로 성주의 넓은 옥토를 지키는 상징적 모습을 하고 있을 정도로 불교문화가 융성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요 불교 문화재로는 성주군 가천면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신라 애장왕 때 조성된 동방사지 칠층석탑이 있다. 동방사지 칠층석탑은 원래 9층이었다가 지금은 7층만 남아 있으며, 성주의 지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 하여 일명 지기탑이라고도 한다.
또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의 가야산에는 통일 신라 시대 거찰이었던 법수사지에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법수사지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시식대가 있고, 보월리 탑안 마을에는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이 있다. 그 외도 현존하는 사찰로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성주 선석사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과 감응사(感應寺) 등이 당시 신라 불교의 화려했던 자취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주 불교의 중심 법수사]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불교 역사는 통일 신라 때인 802년(애장왕 3) 법수사의 창건에서 시작되었다. 법수사는 의상 대사의 법증손인 이정 화상이 화엄 십찰(華嚴十刹)의 한 곳으로 창건한 사찰로 원래는 금당사라 불렀으며, 해인사와 더불어 성주 지역 불교의 진원지(震源地)로 존재하였다.
통일 신라 때 창건 당시 법수사는 경주의 황룡사(皇龍寺) 다음가는 대규모 사찰이었고, 당시 해인사에 비하면 3배~4배가 더 큰 대화엄 종찰(大華嚴宗刹)이었다. 이런 규모의 불사는 왕실의 후원 없이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장왕 황태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해인사 불사를 마무리하고, 금당사 창건 불사를 시작할 때 애장왕이 친히 참배하고 전답 2,500결을 시주했다는 사적기에서 당시 법수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성주에 이런 대가람이 창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통일 신라 때 성주의 위상과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고려 시대에는 균여(均如) 대사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법수사를 찾아왔다. 분열된 화엄 교단을 하나로 통합하여 전쟁으로 상처 받은 민심을 달래고, 화엄의 교의로 교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화엄의 진원지인 법수사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법수사는 균여를 북악계의 승려라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맞이하였다. 이후 균여는 북악파의 종주 희랑 대사를 만나 남북의 화엄을 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법수사는 균여를 통해 갈라진 화엄 교단을 회통(會通)시킨 곳이요, 후삼국 통일 이후 갈라진 민심을 화합시킨 곳이며, 민중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화엄의 「보현십원가」를 구상한 곳으로 민족 화합의 상징적 장소였다. 1114년(예종 9)에는 왕사 낙진이 주지를 지내기도 했을 정도로 고려 시대까지도 법수사는 국가에서 중요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도 법수사는 수행과 포교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가다가, 1409년(태조 9) 태풍과 폭우로 사역(寺域)의 70% 이상이 유실되면서 복구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젊은 승려들이 산성 축성 공사에 동원되는 바람에 활기를 잃었고, 1633년(인조 11) 다시 태풍에 의해 남은 사역까지도 완전히 기울어지면서 법수사는 꺼져 가는 등불이 되었다.
이어 17년 뒤인 1650년(효종 1)에 소규모로 중창하여 사명을 금당사로 개칭하게 된 일화가 구전된다. 금당사 중창 시 법수사의 삼존불상은 인근 용기사로 옮겼다가, 용기사마저 폐사되자 1897년 범운이 지금의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옯겼다고 전한다. 법수사 뒤편 용기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도 1967년 경북대학교로 이운하였다.
이와 같이 법수사의 운명은 성주의 불교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인사의 대적광전 삼존불상을 바라보면 법수사의 영광과 더불어 성주 지역의 화려했던 불교를 추정할 수 있다. 성주 지역은 이외에도 현재까지 귀중한 불교문화 유산들이 지역 곳곳에 산재한 한국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후 성주 불교의 중심이었던 법수사의 역할은 감응사와 선석사로 넘어가게 되었다. 감응사는 일제 강점기 성주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이었다.
[현황]
겨레의 얼이 담긴 귀중한 성주 불교의 많은 유산들이 오랜 세월 속에 풍상을 겪으며 원형이 훼손되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조류에 따른 급속한 국토 개발과 무분별한 각종 건설 사업 등으로 급속히 멸실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산이 많고 개발이 덜 된 가야산 지역과 대도시 팔공산 지역의 중심인 성주의 지역적 특성상 전통 사찰과 암자 토굴이 있는 반면, 작은 규모의 도시적 사찰이 많이 들어서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도시와 인접한 특성으로 인해 사찰 단위의 불교 신도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오랜 전통 사찰과 함께 새로 창건된 신흥 사찰이 도처에 산재해 불교 신도가 아닐지라도 불교문화나 불교적 분위기를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불교 신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남성 불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