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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967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s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기현

[정의]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종교는 종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민중과 더불어 화합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분연히 일어나 항거하며 국가와 민중을 위해 기도하고 수행하는 특성을 보여 오고 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200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종교 화합의 차원에서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의 성주 지역 대표자 30여 명이 함께 서로 다른 종교의 성지를 예방하였다. 이는 다종교 사회의 화합 정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 첫 사례로서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성주 지역의 종교계가 미래의 다종교적·다문화적 공존 사회의 상징적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

성주 지역의 종교의 역사는 불교에서 시작된다. 가야를 거쳐 통일 신라 때인 802년(애장왕 3) 친히 참석한 왕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건립된 법수사(法水寺)의 창건에서 비롯한다. 법수사는 의상 대사(義湘大師)[625~702]의 법증손인 이정 화상이 화엄 십찰(華嚴十刹)의 한 곳으로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금당사라 불렸다. 당시에는 현재의 해인사(海印寺) 규모보다 3배~4배가 더 큰 성주의 사찰이라, 경주의 황룡사(皇龍寺)와 더불어 통일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 성주가 경주와 더불어 신라의 불교를 대표하는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법수사는 많은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균여 대사(均如大師)[923~973]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법수사를 찾아와 당시 분열된 화엄 교단을 통합시켜 전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달래고 민족 화합을 꾀하려고 하였다. 1114년(예종 9)에는 고려 왕사 낙진(樂眞)[1045~1114]이 법수사의 주지를 지낼 정도로 국가의 중요한 사찰이었다. 당시에도 성주가 고려의 불교를 대표하는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인 1409년(태조 9)에 태풍과 폭우로 사역의 7할 이상이 유실되어 더 이상 중창을 못하였다.

1633년(인조 11)에 남은 당우들마저 태풍의 피해를 보면서 법수사는 거의 폐사의 위기에 다다르게 될 정도로 위상이 추락하였다. 창건 때 사찰에 모셨던 삼존불상이 용기사로 잠깐 옮겨졌다가, 1897년 용기사에서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다시 이운되면서 법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와 함께 해인사가 가야산의 대표 사찰이 되면서 신라와 고려 때의 화려했던 성주 불교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는 아직도 귀중한 불교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고 하나 제대로 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질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후 법수사의 역할은 감응사(感應寺)선석사(禪石寺)로 넘어가게 되었다. 감응사는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가장 큰 사찰로서 지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현대에 들어 성주 지역에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많은 사찰들이 새롭게 창건되었고, 현재는 전통 사찰들을 포함해 모두 61개의 사찰이 있다. 성주 지역의 불교는 신라의 화엄 철학에 기반한 화합 정신과 고려 균여의 애민 및 민족 통합 사상의 실천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사찰들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발전하고 있다

[천주교]

성주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개신교보다는 조금 일찍 전래되었다. 19세기 들어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어, 신해박해를 피해 당시 초기 신자였던 성섭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로 피난 오게 되면서 천주교가 전래된 것으로 확인된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에는 전국 각지의 천주교 신자들이 성주의 여러 곳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해 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포교 활동은 1890년대 말 산막터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전개되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막터라는 마을에 살던 주필학이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의 천주교 신부를 만나 입교하고, 대가면 능골의 전루가, 최필수 등의 입교와 함께 성주의 여러 읍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면서 활성화 되었다.

그중 주필학의 아들 주무성 알렉스가 주도하여 1917년 4월 산막터공소를 세웠다. 당시 신자 수가 300명이 넘었던 산막터공소는 1950년 성주성당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가천공소, 초전공소, 광영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어 성주성당을 비롯한 4개의 성당이 여러 곳의 공소들과 함께 현재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3대리구 3지역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주교 역시 성주 지역의 특성에 맞게 성주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위로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개신교]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조금 늦게 전래되었다.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00년대 초 미국 북장로교 대구 선교부 소속 부해리[Henry M. Bruen] 선교사에 의해 전래되었다. 당시 부해리 선교사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에 대흥교회를 설립한 것이 성주 지역의 첫 교회였다. 대흥교회는 1936년 경산교회와 합병하여, 현재의 성주읍교회로 발전하였다. 이후 중리교회를 비롯해 많은 교회들이 여러 지역에 설립되고 신자들이 나날이 늘어나게 되었다.

성주 지역 교회들은 1919년 성주 지역 3.1 운동에 적극 가담해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혼을 불태워 교회가 한민족과 함께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의 가담은 일제의 압박과 통제를 수반했고,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정세가 안정되며 양정교회, 대가교회, 증거교회 등이 각 지역에 설립되어 현재는 68개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개신교도 역시 화합 정신을 기반으로 성주기독교연합회를 발족하여 주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신종교]

성주 지역에서 활동해 온 대표적인 신종교로는 원불교와 대한불교 진각종(眞覺宗)이 있다. 원불교는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이 만든 새로운 종교이며, 진각종은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이 창종한 한국 불교계의 한 종파로 기존의 불교 형태와는 다른 재가 불교, 생활 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새롭게 태어난 불교 종단이다. 성주의 원불교는 1976년에 세워진 원불교 성주교당이 1999년 원불교 성주성지로 지정되면서 원불교의 성역화 사업 등과 함께 매우 활발한 사회사업과 사회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성주의 진각종은 1972년에 설립된 성진심인당을 중심으로 밀교 포교에 열중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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