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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47
한자 崔奎東
영어공식명칭 Choe Gyudong
이칭/별칭 백농(白儂)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최규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최규동 중동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0년 6월 - 최규동 조선교육회 평의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최규동 민립대학설립기성회 경성지방부 집행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최규동 서울대학교 총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50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최규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최규동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최규동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가천로 66[창천리 588]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광신상업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정리사 - 서울특별시
활동지 중동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활동지 대성학교 - 평양
활동지 서울대학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교육자
성별
본관 영천
대표 경력 조선교육회 평의원|서울대학교 총장

[정의]

일제 강점기 중동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펼친 성주 출신의 교육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백농(白儂). 아버지는 최영한(崔永漢)이다.

[활동 사항]

최규동(崔奎東)[1882~1953]은 1882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가천로 66[창천리 588]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사숙(私塾)으로 한학을 공부했고, 성장 후 서울로 유학하여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를 거쳐 정리사(精理舍) 수학연구과를 졸업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에 참여했고, 평양의 기명학교(箕明學校)와 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 운동에 종사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인재 양성만이 독립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으로, 서울의 휘문(徽文)학교, 기호(畿湖)학교, 융희(隆熙)학교, 중앙(中央)학교, 오성(五星)학교 등에서 재직하였다. 1918년에는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설립하여 실력 배양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6월 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商在)·남궁훈(南宮薰) 등과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조직하면서 회장 이상재, 부회장 김사묵(金思默), 이사 윤치소(尹致昭)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다. 한국인의 재력과 노력으로 교육 사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취지 아래 지방 순회 강연 노동 야학 총서를 발간하는 활동도 하였다. 1922년에는 민립대학설립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경성지방부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찬조 위원이 되어 지원하는 한편, 1937년 조선 신궁(神宮)의 중일 전쟁 기원제 발기인, 1941년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평의원 등으로 참여하여 친일 행각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942년 6월에는 일제 관변지 『문교의 조선』에 「죽음으로 군은(君恩)[일본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싣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미군정 하의 교육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7년 조선전기공업중학교(朝鮮電氣工業中學校)를 인수하여 경영했고, 1949년 서울대학교 제4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42년 당시 일본 관변지였던 『문교의 조선』에 일본어로 기고한 「죽음으로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글이 공개되면서 친일 논란에 휘말리자, 중동고등학교 총동문회가 2015년 5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최규동의 친일 논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규명하기 위한 학술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토론회에는 최규동의 친일 논란에 문제 제기를 했던 역사학자 및 언론인들이 참여하였다. 발제는 김형목 박사가 맡았고, 제목은 ‘백농 최규동 선생의 생애와 민족 교육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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