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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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在華 |
영어공식명칭 | Jeong Jaehwa |
이칭/별칭 | 자실(子實),후산(厚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진갑곤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 정재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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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78년 - 정재화 사망 |
출생지 | 정재화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
거주|이주지 | 정재화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
묘소|단소 | 정재화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
성격 | 한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정의]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한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자실(子實), 호는 후산(厚山).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13세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삼성재(三省齋) 정귀석(鄭龜錫), 증조할아버지는 정주영(鄭周永), 할아버지는 정응화(鄭應和)이다. 아버지는 정복용(鄭福容)이고, 어머니는 서흥(瑞興) 김도제(金度濟)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재화(鄭在華)[1905~1978]는 1905년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할머니 상을 당하고, 6일 만에 아버지 상까지 당하였다. 의지할 만한 지친(至親)[5촌 이내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 없었지만 예법에 맞게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렀다. 족형 정재기(鄭在夔)에게 처음 『한사(漢史)』를 배웠고, 이후에는 뇌헌(磊軒) 정종호(鄭宗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서육경(四書六經)을 익히고 당송문(唐宋文)을 읽었으며, 심오한 뜻을 모두 이해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선조 정구(鄭逑)가 편찬한 『심경발휘(心經發揮)』를 두고 학문의 근원으로 삼았고, 예학을 중시하여 위로는 『의례(儀禮)』로부터 아래로는 우리나라 예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집하여 읽었다. 여묘(廬墓)를 지키는 동안에도 예학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경전의 뜻을 명확하고 깊이 있게 밝혀낸 『부위장자복해(父爲長子服解)』를 저술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찰이 상투를 자르려 하자 벼루로 타격했고, 두 차례나 만주로 피신해 자정(自靖)[나라가 망했을 때 지조를 지켜 욕됨 없이 선왕에게 충성을 바침]의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나 늙은 어머니가 계셨기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종호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며 반백 년 동안 절친하게 지낸 여기동(呂箕東)은 세속을 초극한 자질과 꺾을 수 없는 기절을 들어 정재화의 인품을 ‘강개(剛介)’와 ‘인영(人英)’으로 요약하였다.
나이 들어 문중의 중임(重任)을 맡아 『왕조실록』에서 자료를 찾아내고,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을 만들어 한려(寒旅)[한강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시비를 해결하였다. 소위 양강(兩岡)[정구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위차(位次)[위계의 높고 낮음에 따른 차례나 순서] 시비 문제도 잠재웠다. 만년에는 독서와 수양으로 소일했고, 강직 방정하고 신념이 굳을 뿐만 아니라 문장과 행실도 뛰어나 인근에서 명망이 높았다.
[학문과 저술]
『후산졸언(厚山拙言)』 5책, 『부위장자복해(父爲長子服解)』 1책이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지촌(枝村)[갖말] 뒷산 계좌(癸坐)[서남남향] 언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