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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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舜永 |
영어공식명칭 | Jeong Sunyeong |
이칭/별칭 | 휘경(彙卿),이당(彛堂),정서웅(鄭瑞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4월 9일 - 정순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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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3월~1913년 - 정순영 남·북만주·연해주·상하이 등지를 여행하며 독립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음력 1월 15일 - 정순영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유세부장을 맡음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7월 15일 - 정순영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국외 연락책 맡음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정순영 펭톈에서 삼달양행정미소 운영, 남만주 연락책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9월 3일 - 정순영 대구 권총 사건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10월 - 정순영 만주, 지린, 펑톈 등에서 독립운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2월 - 정순영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3월 - 정순영 이상규 등과 인도공의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1월 11일 - 정순영 대한독립단 관련 혐의로 김기한 등과 함께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9월 20일 - 정순영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7월 - 정순영 조선민흥회 창립준비위원회 준비 위원으로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11월 15일 - 정순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정순영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정순영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정순영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한강길 7-42[수성리 812] |
거주|이주지 | 정순영 이주지 - 대구광역시 |
거주|이주지 | 정순영 이주지 - 중국 만주 일원 |
활동지 | 정순영 활동지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정순영 활동지 - 중국 만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국권회복단 유세부장|대한광복회 남만주 연락책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휘경(彙卿), 호는 이당(彛堂). 이명은 정서웅(鄭瑞雄)으로 만주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정주석(鄭周錫)이다.
[활동 사항]
정순영(鄭舜永)[1879~1941]은 1879년 4월 9일 경상북도 성주군 청파면 수성동 812번지[현 수륜면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에 뜻을 두고 1906년 11월 박상진(朴尙鎭)·권영만(權寧萬) 등과 함께 대구 이시영(李始榮)의 집에서 구국책(救國策)을 논의하였다. 1907년 3월부터 1913년까지 남·북만주(南北滿洲)·연해주(沿海洲)·상하이[上海] 등지를 여행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귀국하였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윤상태·홍주일·이시영·서상일 등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중앙 총부는 통령(統領)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문서부장 서병룡(徐丙龍)·이영국(李永局), 교통부장 이시영·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 홍주일(洪宙一), 권유부장 김규(金圭), 결사대장 황병기(黃炳基), 마산지부장은 안확(安廓), 그리고 정순영은 유세부장(遊說部長)을 맡았다.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 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총사령 박상진이 직접 지휘하는 본부를 중심으로 국내 지부와 길림광복회, 그리고 국내외 연락 기관을 설치하였다. 본부 회장 박상진, 만주 사령관 이석대(李奭大)[이진룡(李鎭龍)], 그리고 만주 안동 여관(安東旅館)의 손일민(孫逸民)과 함께 국외 연락책을 맡았다. 1916년 가족과 함께 펑톈[奉天]에서 삼달양행정미소(三達洋行精米所)를 운영하며 남만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9월 3일 총사령 박상진의 명령으로 이시영·홍주일·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㤠)·최병규(崔秉圭)·최준명(崔俊明)·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瑀) 등이 군자금 모집을 감행한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大邱拳銃事件)’에 참여하였다. 대구 권총 사건으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의 단원들이 체포되자 1916년 10월경 만주로 들어가 지린[吉林]·펑톈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정안립(鄭安立)이 설립한 조선고사연구회(朝鮮古史硏究會)에 가입하여 중국·한국·러시아 3국인을 결합하여 대동민국(大東民國)을 건설할 계획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2월 귀국하였다. 1920년 3월 이상규(李相珪) 등과 함께 서울에서 인도공의회(人道公議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중순 루허현[柳河縣] 싼위안바오[三源浦]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전권 특파원 김기한(金起漢)·경기도 시찰 전권 위원 강지형(姜芝馨)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국내 지단(支團)의 전국 중앙 기관으로 서울의 중앙 본부와 전국 각 군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단 국내 지방 분치 기관 임시 통칙(大韓獨立團國內地方分置機關臨時通則)」·「격고국내진신사림(檄告國內縉紳士林)」 등의 문서를 전국 각처에 배포하였다. 1920년 11월 11일 대한독립단 중앙 본부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김기한 등과 함께 체포되어,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1년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의 창립 준비위원회 준비 위원으로 참여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 후 경상남도 진주·남해·전라남도 목포 등지를 전전하다가 1941년 11월 17일 대구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