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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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鉉昌 |
영어공식명칭 | I Hyeonchang |
이칭/별칭 | 희서(姬瑞),치당(恥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6월 2일 - 이현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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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이현창 파리 장서 서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29일 - 이현창 대구지방법원에서 결석 재판으로 징역 6월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9월 16일 - 이현창 추석을 맞아 귀가하다가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9월 28일 - 이현창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6월 23일 - 이현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현창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현창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511 |
거주|이주지 | 이현창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
활동지 | 이현창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희서(姬瑞), 호는 치당(恥堂). 조선 시대 문신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1567~1634]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화준(李華俊), 어머니는 광주 노씨(光州盧氏)이다.
[활동 사항]
이현창(李鉉昌)[1865~1930]은 1865년 6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511번지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와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에 반대하여 을사조약에 동조한 역적 대신들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이승희(李承熙)가 올린 상소문인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에 연명하였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이 프랑스에서 열리던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보내는 글, 곧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할 때, 한국 유림 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당시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의 경산 이씨(京山李氏) 일족인 이계원(李啓源)과 이계준(李季埈)에게도 권유하여 함께 서명하게 하였다. 이계원과 이계준은 파리 장서 초안을 작성한 회당(晦堂) 장석영의 문하였고, 사미헌 장복추 문하에서는 이현창과 함께 수학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은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들이 잡혀 조사 받는 과정에서 발각되었다. 일제 군경이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유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고, 이현창은 피신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결석 재판이 열려 징역 6월이 선고되었고, 이후 2년 5개월 만인 1921년 9월 16일 추석을 맞아 귀가했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30년 6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