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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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判星 |
영어공식명칭 | I Panseong |
이칭/별칭 | 이판성(李判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1월 15일 - 이판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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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이판성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2월 28일 - 이판성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7월 26일 - 이판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이판성 건국 포장 추서 |
출생지 | 이판성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
거주|이주지 | 이판성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
활동지 | 이판성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고부(古阜). 다른 이름으로 이판성(李判成)을 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이태옥(李泰玉)이며, 어머니는 이범이(李範伊)이다.
[활동 사항]
이판성(李判星)[1894~1983]은 1894년 1월 15일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동 1197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성주 읍내의 만세 시위 운동은 유림과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각기 추진하다가 공동으로 연대하여 연합 만세 시위로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동의 이현기(李玄琪)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동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야소교 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유진성(兪鎭成)은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유림 측에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9년 3월 30일 유진성은 유림 측의 송회근(宋晦根)을 만나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펼치기로 협의하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동의 교회 영수 오의모와 대가면 옥화동의 교회 영수 홍진수에게 성주군 각 면의 교인과 각처 교회 간부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오후 1시경,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 시장을 향해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장에 운집해 있던 60명의 유림들이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이판성은 밤 10시경까지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었다. 이판성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0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여 1920년 3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3년 7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