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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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熙 |
영어공식명칭 | I Seunghui |
이칭/별칭 | 계도(啓道),강재(剛齋),대계(大溪),한계(韓溪),대하(大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47년 2월 19일 - 이승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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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67년 - 이승희 내정 개혁 촉구 5조목의 대책문 올림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이승희 영남 만인소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이승희 동학 농민군에 대응하여 민보군 결성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승희 을미의병 창의 실패, 외교적 방안 모색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12월 25일 - 이승희 을사늑약 반대 투쟁으로 대구 경무서에 구속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4월 7일 - 이승희 출옥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승희 만국 평화 회의에 편지 보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2월 - 이승희 국채 보상 운동 펼침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5월 - 이승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이승희 북만주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 건설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이승희 남만주 단동 접리수촌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및 공교회 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이승희 남만주 봉천에서 요중현 덕흥보 독립운동 기지 건설 |
몰년 시기/일시 | 1916년 2월 27일 - 이승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이승희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이승희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
거주|이주지 | 이승희 이주지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거주|이주지 | 이승희 이주지 - 중국 미산부 한흥동 |
거주|이주지 | 이승희 이주지 - 중국 안동현 접리수촌 |
거주|이주지 | 이승희 이주지 - 중국 봉천부 요중현 덕흥보 |
학교|수학지 | 이승희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활동지 | 이승희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활동지 | 이승희 활동지 - 중국 |
묘소 | 이승희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한주학파(寒洲學派)를 계승한 유학자로 개항기 성주 지역의 위정 척사 운동을 주도했고, 대한 제국기 국권 회복을 위한 성주 지역의 구국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8년 5월 연해주로 망명하여 1909년 북만주 밀산부(蜜山府)에서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개척했고, 1913년 남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겨 공교회(公敎會)[Catholic Church, Universal Church] 운동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 접리수촌을 개척하였다. 이어 베이징[北京]을 거쳐 1914년에 남만주 봉천에서 독립운동 기지 요중현 덕흥보를 개척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계도(啓道), 호는 젊어서는 강재(剛齋), 장년에는 대계(大溪).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망명 후인 1909년 겨울부터 이름은 대하(大夏), 호는 한계(韓溪). 아버지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며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이다.
[활동 사항]
이승희(李承熙)[1847~1916]는 1847년(헌종 13)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성학·호적·전제·선거·제병의 오조목(五條目)에 관해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시국 대책문을 흥선 대원군에게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척사론적 입장에서 비판하여 성리학적 전통의 사회 질서를 옹호하였다. 특히 1882년 1월 이만손(李晩孫)을 소수(疏首)로 한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에 대한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기 위해 모였을 때는,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조선이 처한 대내외적 위기를 역설하였다.
동학이 189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보은 집회를 거치며 삼남 지방으로 교세를 확장하자, 1893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을 대신하여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지어 동학을 비류(匪類)로 비판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동문들과 창의를 모색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의 반대로 그만둔 뒤 외교적인 방안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곽종석·장완상(張完相)·강구상(姜龜相)·이두훈(李斗勳) 등과 함께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이토일본국사통고천하각국공관문(以討日本國事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1905년 8월 외우내환에 허덕이던 국가의 실정을 통탄하는 「의진시사소(擬陳時事疏)」를 올려 과감한 내정 개혁을 촉구하였다. 이어진 11월에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가, 12월 25일 대구경무서에 구속되어 문초를 당하였다. 일제 경찰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회유했으나 오히려 큰 소리로 꾸짖으며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옥중에서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꾸짖는 편지도 썼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천하강상지적(天下綱常之賊)”으로 지목하는 등 옥중 투쟁을 벌이다가, 1906년 4월 7일에 출옥하였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 보상 운동이 발기되어 전국으로 확산되던 3월 20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 죄상을 알리고 심판을 호소하는 「여화란국해아만국평화회중서(與和蘭國海牙萬國平和會中書)」를 지었다. 일본이 밀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압박하자 「이해아변무사통고만국정부문(以海牙辨誣事通告萬國政府文)」을 지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이덕후(李德厚)·정인하(鄭寅夏)·이수인(李洙仁) 등의 동문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09년 겨울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의 기름진 터를 골라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였고, 독립운동 기지로 개척하며 100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켜 한흥동이라 이름하였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승희는 마을 규약인 민약(民約)을 만들고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고 이름하였다.
1913년 밀산부에서 남만주의 안동현으로, 1914년 다시 펑톈[奉天]의 시따[西塔][현 선양의 서탑]로 이주하며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1914년 8월 경상남도 함안 출신의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와 함께 토지 매입을 추진하여, 랴오중현 덕흥보에 약 백여 호의 생계 유지가 가능할 만한 토지 280일경(日耕)을 매입하였다. 시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정규·이광룡·이계동·정돈섭·이우열·이성훈 등의 협조를 얻어 추진한 것이었고, 농장일은 아들 이기인(李基仁)에게 맡겼다.
1915년 봄 이주를 위해 덕흥보로 들어갔으나, 매입한 땅은 해동되면 물바다가 되는 곳이었다. 집단 농장을 만들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겠다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망명 인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승희는 시따의 일승잔(日昇棧)에 머물면서 공교회 운동에 전념하였다. 1916년 2월 27일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한계유고(韓溪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 송래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