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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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熙 |
영어공식명칭 | I Bonghui |
이칭/별칭 | 성옥(聲玉),인와(忍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9월 25일 - 이봉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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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이봉희 제1차 유림단 의거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이봉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21일 - 이봉희 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9월 30일 - 이봉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봉희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봉희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1길 11-1[가암리 716] |
활동지 | 이봉희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성옥(聲玉), 호는 인와(忍窩). 고려 개국공신 성산백(星山伯) 이능일(李能一)의 29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주상(李柱相),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태희(李兌熙)는 형이다.
[활동 사항]
이봉희(李鳳熙)[1880~1958]는 1880년 9월 25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1길 11-1[가암리 716]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과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유림의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김창숙(金昌淑)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긴 문장의 글, 곧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지어 137명이 서명한 유림단(儒林團)의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개최되던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였다. 당시 이봉희는 송준필로부터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권유받고 성대식(成大湜)과 함께 서명했고, 장진호(張鎭浩)에게 서명을 권유하여 찬성 의사를 얻었다.
한편,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 분위기 속에 경상북도 성주 지역 개신교인들이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워 유림 측에 알렸고, 같은 계획을 세웠던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 등의 유림 측도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봉희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참여 의사를 밝히고, 김희규(金熙奎)에게도 알려 동참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이봉희, 이봉희의 형 이태희, 야성 송씨(冶城宋氏) 일가, 그리고 군중들이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시장에서 함께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형 이태희와 다른 2명이 현장에서 함께 목숨을 잃었고, 이봉희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불복하며 바로 항소하여, 1919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8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