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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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勳翼 |
영어공식명칭 | Song Hunik |
이칭/별칭 | 성방(聖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9월 22일 - 송훈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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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송훈익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0일 - 송훈익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61년 2월 27일 - 송훈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송훈익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송훈익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248 |
거주|이주지 | 송훈익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248 |
학교|수학지 | 송훈익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활동지 | 송훈익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성방(聖放). 아버지는 송인섭(宋寅燮)이다.
[활동 사항]
송훈익(宋勳翼)[1884~1961]은 1884년 9월 22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248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족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15세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근면했으며, 체력이 뛰어나 장사(壯士)로 소문났다. 1919년 3.1 운동 뒤에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 일명 파리 장서 운동을 주도했던 송준필을 후원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이 유림단의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난 뒤, 3월 29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야성 송씨 종택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이에 호응하였다. 송훈익도 송회근(宋晦根)·송수근(宋壽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李鳳熙) 등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 몇 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의 분노는 한층 높아졌다.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쪽의 군청 앞과 그 양쪽 길에 700명~800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동쪽 우체국 앞으로부터 시장 통로에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들은 일제 경찰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밤 10시경에 해산하였다.
송훈익은 장석영(張錫英)·송규선(宋圭善)·송준필·이봉희·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문근(宋文根)·송회근·송우선(宋祐善)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된 후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며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1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