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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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文根 |
영어공식명칭 | Song Mungeun |
이칭/별칭 | 회부(會夫)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9월 10일 - 송문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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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송문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0일 - 송문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11월 25일 - 송문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송문근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송문근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거주|이주지 | 송문근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학교|수학지 | 송문근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활동지 | 송문근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회부(會夫). 아버지는 송준복(宋浚福)이다.
[활동 사항]
송문근(宋文根)[1895~1963]은 1895년 9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일찍이 삼종숙(三從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나, 가세가 곤란하여 중도에 그만두고 집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獨立請願運動)을 주도했던 송준필을 후원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이 유림단의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떠난 뒤에는, 삼종숙 송준필, 사촌 형 송회근(宋晦根), 족친 송규선(宋圭善)·송우선(宋祐善)·송수근(宋壽根) 등과 함께 성주군 초진면 고산리의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도 준비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의 김희규(金熙奎)도 이 소식을 듣고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4월 2일의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송우선·송회근의 주도하에 이에 호응했고, 송문근도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규선·이봉희(李鳳熙) 등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군경이 주동 인물 검거에 나서면서 장석영(張錫英)·송규선·송준필·이봉희·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우선·송회근·송훈익 등과 함께 송문근도 검거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송문근은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했고,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11월 24일 향년 70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