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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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圭善 |
영어공식명칭 | Song Gyus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2월 20일 - 송규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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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5년 4월 18일 - 송규선 학부 주사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1월 - 송규선 경성부 참서관으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6월 30일 - 송규선 임시재원조사국 기수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0월 6일 - 송규선 임시재산정리국 기수 겸 재무감독국 기수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8월 - 송규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송규선 성주읍 장날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21일 - 송규선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8년 4월 27일 - 송규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송규선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04년 - 송규선 추모 백세각 항일 의적비 건립 |
출생지 | 송규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9[고산리 534] |
거주|이주지 | 송규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9[고산리 534] |
활동지 | 송규선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경성부 참서관|임시재원조사국 기수|임시재산정리국 기수|재무감독국 기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경상북도 성주 지역 3.1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19년 3월 파리 장서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서 만세 시위 군중 3,000여 명의 선두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현백(玄柏), 호는 자광(自光). 충숙공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1494~1558]의 15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춘익(宋春翼)이다.
[활동 사항]
송규선(宋圭善)[1880~1948]은 1880년 12월 20일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흑수 외가에서 태어나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34번지 본가로 돌아왔다. 일찍이 족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문사(文詞)와 필법(筆法)이 뛰어나 향촌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895년 4월 18일 학부(學部) 주사(主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1896년 1월 경성부 참서관(參書官), 1908년 6월 30일 임시재원조사국(臨時財源調査局) 기수(技手), 1909년 10월 6일 임시재산정리국(臨時財産整理局) 기수를 맡았고, 1910년 3월 15일 임시재산정리국 기수 겸 재무감독국 기수를 맡았다. 1911년 8월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두문불출하며 가사를 돌보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려는 유림단의 파리 장서 운동[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였다. 송준필, 장석영(張錫英), 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작성한 뒤 연락 본부를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으로 정하고 서명 운동을 전개할 때, 경상북도 연락책을 맡았다. 각처 유림을 규합하여 서명을 받은 파리 장서를 김창숙을 통해 상하이[上海]로 보내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성주 백세각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 통고문을 송회근(宋晦根)·송문근(宋文根)·송우선(宋祐善)·송수근(宋壽根) 등과 함께 각지로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만들어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의 개신교인 김희규(金熙奎)도 이 소식을 듣고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개신교인 오의모(吳義模) 등을 규합하여 4월 2일의 만세 시위를 함께 전개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개신교인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송우선·송회근의 주도하에 이에 호응했고, 송규선도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문근·이봉희(李鳳熙) 등과 함께 시위 행렬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 군중은 일시 후퇴했다가 밤늦게까지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장석영·송문근·송준필·이봉희·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우선·송회근·송훈익 등과 함께 송규선도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송규선은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했고,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8년 4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4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백세각 항일 의적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