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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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學伊 |
영어공식명칭 | Seo Hak-i |
이칭/별칭 | 흑파사(黑波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허종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6월 15일 - 서학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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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월 - 서학이 대구에서 융진단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4월 20일 - 서학이 서울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다 붙잡힘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6월 8일 - 서학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9월 30일 - 서학이 무정부주의 조직 진우연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4월 - 서학이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 흑색청년연맹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8월 - 서학이 진우연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힘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7월 5일 - 서학이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4월 13일 - 서학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서학이 건국 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서학이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서학이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 |
거주|이주지 | 서학이 이주지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서학이 활동지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서학이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학이(徐學伊)[1900~1955]는 1900년 6월 15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대구로 이주하여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졸업하고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1월 대구에서 이상정(李相定), 서상욱(徐相郁) 등과 사회주의 계열의 사상 단체인 용진단(勇進團)을 결성하여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용진단의 목적은 단원의 단결과 상호 부조, 친목 도모, 그리고 계급 해방이었다.
1925년 4월 20일 서상욱, 김민동(金旻東), 신철수(申哲洙) 등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조선 민중 운동자 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일제 경찰이 대회를 불허하자 신철수 등과 회합하여 시위를 계획하고, 같은 날 밤 종로에서 수십여 명과 함께 적기(赤旗)를 흔들며 시위를 벌이다 붙잡혔다. 같은 해 6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대구로 돌아와 서울에서 경험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사상과 운동 노선을 모색하였다. 안달득(安達得), 김소성(金召成),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과 활동 방향을 논의한 끝에 무정부주의에 주목하였다. 1925년 7월 지배 계급과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자유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방한상, 신재모 등과 무정부주의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노동공제회 회관에서 학술 연구 단체를 표방하며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였다.
1925년 10월 일본에서 귀국한 무정부주의자 김정근(金正根)을 만나 운동 방법을 협의하고,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를 추진하였다. 1926년 4월 진우연맹 회원들과 함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南]를 만나 일본의 무정부주의 운동의 현황을 청취하고,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또한 일제 주요 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을 실행하는 직접 행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26년 4월 진우연맹 회원들과 논의한 끝에 대구의 도청·부청·경찰서·재판소 등을 포함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주요 기관을 폭파하고, 도지사·경찰부장 등 일제 주요 인물을 암살하기로 결의하였다. 동시에 대구의 일본인 시가지인 원정(元町)[현 북성로]과 대화정(大和町)[현 대안동] 거리 일대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는 류림(柳林)에게 폭탄을 받기로 계획하였다.
1926년 5월 일본에서 김정근이 보내준 「반역아연맹 선언서(叛逆兒聯盟宣言書)」를 읽은 후, 그 취지에 동의하여 방한상, 정명준, 신재모 등과 반역아연맹에 가입하였다. 동시에 중국의 무정부주의자와 연락을 가지고 국제적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원동무정부주의자총연맹(遠東無政府主義者總聯盟)이 결성될 경우 가입하기로 결의하였다. 1926년 5월 진우연맹 회원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직의 실체가 노출되었다.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진우연맹 회원 12명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5년 4월 13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