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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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京夏 |
영어공식명칭 | Bak Gyeongha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2월 22일 - 박경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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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박경하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5일 - 박경하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9월 26일 - 박경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박경하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박경하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매수3길 60[매수리 1120] |
거주|이주지 | 박경하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매수3길 60[매수리 1120] |
활동지 | 박경하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경하(朴京夏)[1883~1929]는 1883년 12월 22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 1120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27일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의 이현기(李玄琪)와 성주군 가천면 동원리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합세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매수리에 거주하던 박경하는 흥산리의 백성흠(白聖欽)과 칠봉리의 김원술(金元述), 성주읍 경산리의 배상윤(裵相潤)과 어물상 서병준(徐丙俊), 용암면 동락리의 노기학(魯基學), 초전면 자양리 출신의 김구진(金龜鎭) 등과 함께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오후 1시에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도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의 주도하에 송수근(宋壽根)·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李鳳熙) 등이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일제 경찰이 시위 군중을 막으며 주도 인물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3,000여 명의 시위대가 분노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서 및 군청 앞의 양쪽 도로와 우편국 앞에서 시장에 이르는 도로에서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 외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오후 10시경에 해산하였다.
박경하는 배상윤·서병준·백성흠·노기학·김원술·김구진 등과 함께 체포된 후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배상윤·서병준·백성흠·노기학·김원술·김구진 등과 함께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9년 9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