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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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熙奎 |
영어공식명칭 | Gim Huigyu |
이칭/별칭 | 우문(宇文),호당(湖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9월 30일 - 김희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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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김희규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0일 - 김희규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11월 5일 - 김희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희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11월 10일 - 김희규 선생 기념비 건립 |
출생지 | 김희규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69 |
거주|이주지 | 김희규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69 |
활동지 | 김희규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우문(宇文), 호는 호당(湖堂). 아버지는 김선모(金善模)이다.
[활동 사항]
김희규(金熙奎)[1894~1959]는 1894년 9월 30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69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기독교인이었던 김희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성주 유림의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과 족친 송회근(宋晦根)·송우선(宋祐善)·송수근(宋壽根)·이봉희(李鳳熙) 등이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있는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배포하는 한편, 4월 2일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유림 측의 송회근을 만나 4월 2일의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김희규는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오후 1시를 기해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과 함께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이에 호응하며 송우선·송회근의 주도하에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 등이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 몇 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들이 분노하였다.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쪽의 군청 앞과 그 양쪽 작은 길에 700명~800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동쪽 우체국 앞으로부터 시장 통로에는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들은 일제 군경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밤 10시경에 해산하였다.
김희규는 장석영(張錫英)·송규선·송준필·이봉희·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우선·송회근·송훈익·송문근 등과 함께 일제 군경에 검거된 후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며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9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 11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마을 입구에 공적을 추모하기 위한 김희규 선생 기념비(金熙奎先生紀念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