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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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鶴伊 |
영어공식명칭 | Gim Hak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2월 20일 - 김학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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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김학이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김학이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3월 9일 - 김학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학이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학이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
거주|이주지 | 김학이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 629 |
활동지 | 김학이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아버지는 김영석(金永錫)이며 어머니는 송옥순(宋玉順)이다.
[활동 사항]
김학이(金鶴伊)[1896~1922]는 1896년 2월 20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선남면 동암리 629번지에서 살았다. 성주군 야소교(耶蘇敎) 북장로파 신도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1919년 3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동[현 소학리]의 이현기(李玄琪)와 가천면 동원동[현 동원리]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현 옥화리] 교회 조사(助事) 유진성(兪鎭成)은 유림 측에서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 30일 유림 측의 송회근(宋晦根)을 만나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동[현 동포리]의 교회 영수 오의모(吳義模)와 대가면 옥화동의 교회 영수 홍진수(洪鎭洙)로 하여금 각 면의 교인과 각처 교회 간부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오의모와 홍진수의 권유를 받은 김학이는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김학이는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 오의모·홍진수·김재곤(金在坤)·김석규(金錫圭)·김치권(金致權)·김상직(金尙直) 등의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성주면 경산동[현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오의모·김재곤·홍진수·김석규·김치권·김상직 등과 함께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오의모·김재곤·홍진수는 각기 징역 1년, 김학이를 비롯한 김석규·김치권·김상직 등 4명은 각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김학이는 같은 해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2년 3월 9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