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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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淑 |
영어공식명칭 | Gim Changsuk |
이칭/별칭 | 문좌(文佐),심산(心山),벽옹(躄翁),우(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7월 10일 - 김창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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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5년 12월 - 김창숙 을사늑약 반대 투쟁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3월 - 김창숙 국채 보상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김창숙 파리 장서 운동 주도, 중국 상하이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김창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8월 - 김창숙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제2차 유림단 사건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김창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부원장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김창숙 상하이 공동조계 병원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12월 - 김창숙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4년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김창숙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9월 - 김창숙 임시 정부 및 연합국 환영 대회 부회장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월 - 김창숙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김창숙 비상 국민 회의 최고 정무 위원으로 선정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9월 - 김창숙 성균관과 성균관대학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3월 - 김창숙 남한 단독 총선거 반대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김창숙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 대회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3월 1일 - 김창숙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
몰년 시기/일시 | 1962년 5월 10일 - 김창숙 사망 |
출생지 | 김창숙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칠봉리 504] |
거주|이주지 | 김창숙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칠봉리 504] |
활동지 | 김창숙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활동지 | 김창숙 활동지 - 중국 상하이 및 베이징 |
활동지 | 김창숙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서울 수유 국가 관리 묘역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4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부원장|건국동맹 남한 책임자|성균관대학교 총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의 문인으로 1905년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1907년 국채 보상 운동, 1919년 독립 청원 운동,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 등의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이후 1946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는 등 신국가 건설 운동에 헌신하였다.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 또는 벽옹(躄翁). 본래의 이름은 창숙(昌淑)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이란 별호(別號)가 붙었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13세 종손이다. 아버지는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1842~1896]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큰아들은 김환기(金煥基), 둘째 아들은 김찬기(金燦基)이다. 둘째 며느리는 독립운동가 손후익(孫厚翼)[1888~1953]의 딸 손응교이다.
[활동 사항]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1879년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12월 스승인 한계 이승희와 함께 「청주적신파륵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려 강제로 체결된 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을사오적의 참수를 요구하였다. 1907년 3월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결성하고 이끌어가던 스승 이승희가 1908년 5월 연해주로 망명한 뒤,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이끌어 가는 한편, 1910년 4월 국채보상금처리회(國債報償金處理會) 전국 대표자 회의 성주군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성주군에서 보관하고 있던 국채 보상 지원금으로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 12월 사회적 변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한협회 성주지회 총무를 맡았다. 1909년 2월 일진회의 합방론에 반대하는 「일진회 성토 건의서(一進會聲討建議書)」를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이 일로 성주군 헌병분견소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았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을 추진한 민족 대표에 유림이 빠진 것을 통탄하여 유림단(儒林團)의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 청원 운동, 이른바 ‘파리 장서 운동(巴里長書運動)’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김창숙은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펑톈[奉天]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가서 영어로 번역한 후 파리 강화 회의와 각국 외교관에게 송부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1919년 4월 30일부터 열린 임시 의정원 제4차 회의에서 김정묵(金正默)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5차 회의에서는 교통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부의장(副議長)직에도 당선되었다.
1919년 7월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오산(吳山)·쉬첸[徐謙]·장빙린[章炳麟] 등과 한·중 협력을 합의하고 광둥[廣東]으로 갔다. 같은 해 8월 광저우[廣州]에 도착하여 이문치(李文治)를 통해 광둥군 정부 관계자와 회담하고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를 결성하는 한편,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임복성(林福成)과 함께 한중 공동의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베이징[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김정묵 등과 함께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1년 4월 신채호·김원봉(金元鳳) 등과 이승만(李承晩)의 위임 통치 청원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으며, 박용만(朴容萬)을 중심으로 조직된 보합단의 재무를 맡았다.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 대표 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자 국민 대표 회의를 비판하고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한편, 이승만을 성토·탄핵하여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장기적인 독립 전쟁 준비 방략을 협의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 교포들을 모아 집단 거주지를 마련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 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297.52㎢[3만 정보]를 무상 조차하였고, 개간 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 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내로 결사대를 파견, 각종 식민지 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12월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1927년 5월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 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28년 12월 대구지방법원 복심법원에서 징역 14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1943년 둘째 아들 김찬기(金粲基)를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 정부에 파견하였고, 1944년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건국동맹 관여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고향 성주로 돌아왔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 정부 및 연합국 환영 대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2월에는 비상 국민 회의(非常國民會議) 최고 정무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48년 3월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운동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50년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공산당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951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 정치 파동 때 국제구락부(國際俱樂部)에서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 대회(反獨裁護憲救國宣言大會)를 주도하는 등 민족을 위한 불굴의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1962년 5월 10일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자서종요(字書綜要)』, 『벽옹70년회상기(躄翁70年回想記)』, 『심산유고(心山遺稿)』등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서울 수유 국가 관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3월 1일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