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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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坤 |
영어공식명칭 | Gim Jaeg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9월 18일 - 김재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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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김재곤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김재곤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65년 11월 10일 - 김재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재곤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재곤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575 |
거주|이주지 | 김재곤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575 |
활동지 | 김재곤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활동 사항]
김재곤(金在坤)[1886~1965]은 1886년 9월 18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 575번지에서 태어났다. 예수교[耶蘇敎] 북장로파 소속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교회 영수(領袖) 홍진수(洪鎭洙)의 조사(助事)로 있었다. 1919년 3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의 이현기(李玄琪)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리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은 유림 측에서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 30일 유림 측의 송회근(宋晦根)을 만나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펼치기로 협의하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교회 영수인 홍진수와 조사 김재곤으로 하여금 성주군 각 면의 교인과 각처 교회 간부들을 규합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 홍진수는 김재곤을 비롯하여 성주 군내의 북장로파 신도 김석규(金錫圭)·김치권(金致權)·김학이(金鶴伊)·김상직(金尙直) 등과 함께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홍진수와 김재곤을 비롯한 기독교도들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을 향해 나아가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고, 유림 측에서도 송우선(宋祐善)·송회근의 주도하에 송수근(宋壽根)·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李鳳熙) 등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이때 김재곤은 오의모·홍진수·김석규·김치권·김학이·김상직 등과 함께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재곤은 오의모·홍진수 등과 함께 징역 1년, 김석규·김치권·김학이·김상직 등 4명은 각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김재곤은 같은 해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65년 11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