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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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直 |
영어공식명칭 | Gim Sangjik |
이칭/별칭 | 김상직(金相直),김성진(金聲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11월 17일 - 김상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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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김상직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10월 26일 - 김상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김상직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김상직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
거주|이주지 | 김상직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
활동지 | 김상직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다른 이름으로 김상직(金相直)·김성진(金聲振)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김의권(金義權)이며 어머니는 권기순(權奇順)이다.
[활동 사항]
김상직(金尙直)[1874~1929]은 1874년 11월 17일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대가면 도남리에서 살았다. 성주군 야소교(耶蘇敎) 북장로파 신도였고,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의 이현기(李玄琪)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리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야소교 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유진성(兪鎭成)이, 유림 측에서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 30일에 유림 측의 송회근(宋晦根)을 만나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펼치기로 합의하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이어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동의 교회 영수 오의모(吳義模)와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영수 홍진수(洪鎭洙)로 하여금 성주군 각 면의 교인과 각처 교회의 간부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당시 김상직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영수인 홍진수의 권유를 받고 참여를 결정하고,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에 홍진수·김재곤(金在坤)·김석규(金錫圭)·김치권(金致權)·김학이(金鶴伊) 등의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김상직은 오의모·김재곤·홍진수·김석규·김치권·김학이 등과 함께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석규·김치권·김학이와 함께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오의모·김재곤·홍진수는 각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김상직은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