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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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益重 |
영어공식명칭 | Choe Ikjung |
이칭/별칭 | 숙겸(叔謙),부훤재(負暄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717년 - 최익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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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최익중 생원시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88년 - 최익중 사망 |
출생지 | 최익중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거주|이주지 | 최익중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수학|강학지 | 최익중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수학|강학지 | 최익중 강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 |
묘소|단소 | 최익중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천 |
대표 관직|경력 | 성균관 생원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字)는 숙겸(叔謙), 호는 부훤재(負暄齋). 죽헌(竹軒)최항경(崔恒慶)[1560~1638]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최기(崔琦)이고, 할아버지는 최후륭(崔后隆)이다. 아버지는 최윤(崔崘)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윤동로(尹東魯)[1663~1741]의 딸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부인은 상산 주씨(商山周氏) 주회성(周晦成)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익중(崔益重)[1717~1788]은 1717년(숙종 43)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나, 정성을 다해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본생조(本生祖)인 최후대(崔后大)[1669~?]를 극진히 공경하였다.
1746년(영조 22)에는 문중의 친족들과 함께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이곳에서 선조의 제사, 일가친척과의 친목, 자제 교육 등을 행하였다. 또한 죽헌 최항경. 관봉(鸛峯) 최은(崔𨏈)[1583~1656], 월주(月洲) 최진화(崔震華)[1611~1686] 등 세 선조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갈무리해 둠으로써 선조들의 문집 편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56년(영조 32)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조정에 학교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는 방도, 세상을 경영하여 구제하는 방법 등을 고했으나 쓰이지 않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차마 거둘 수 없어, 송(宋)나라 사람이 등에 햇볕 쬐는 일을 임금께 아뢰었던 고사를 취하여, 거처의 이름을 ‘부훤(負暄)’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훤에서 조용히 거처하며 성리서(性理書)와 예서(禮書)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앉은 자리 오른편에 「심경찬(心鏡贊)」과 「인자설(忍字說)」을 써 두고서 스스로 반성하는 도구로 삼았다.
한편, 1772년(영조 48)에는 여러 종형제(從兄弟)와 함께 의장(義庄)[친족을 구제하기 위해 관리하는 전장(田莊)] 제도를 본받아 의계(義契)를 만들었다. 이어서 십수 년 후에 밭을 사들였는데, 수입의 3할은 조상을 위해 사용하고, 5할은 여러 종형제 중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자 또는 친척 중 매우 가난한 자를 경중(輕重)에 따라 돕는 데 사용하였다.
이후 1782년(정조 6)에는 사림(士林)과 함께 선조 최항경이 도를 강마하던 장소에 오암서원(鰲巖書院)을 건립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1785년(정조 8)에는 죽헌정사(竹軒精舍)를 중수(重修)하면서 대나무 수십 그루를 정사 뒤에 옮겨 심어 선조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학문과 저술]
최익중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검속(鈐束)이 없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9세 때부터 본생조인 최후대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겨우 15세 무렵에 이미 문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장성해서는 학문 수양에 더욱 부지런하여 독서를 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완미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에도 널리 통하였다.
그는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에 대한 주장을 통해 성학(聖學)의 근본을 밝혔고, 의관과 신발, 띠, 베개, 이불, 안석, 병풍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들에 명(銘)을 새겨 스스로를 경계하는 도구로 삼았다. 또한 그의 문장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으로부터 ‘옷깃을 저절로 여미게 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현재 문집으로 『부훤재문집(負暄齋文集)』 8권 4책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이현(梨峴)[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족종손(族從孫)인 최봉곤(崔鳳坤)이 행장(行狀)을 썼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또한 송수근(宋壽根)[1896~1969]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했으며, 손자인 최규한(崔逵翰)이 유사(遺事)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