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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41
한자 鄭弘錫
영어공식명칭 Jeong Hongseok
이칭/별칭 계응(季膺),운계(雲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정홍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612년 - 정홍석 아버지 정치로부터『소학』을 수학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정홍석 정묘호란 때 장인 이천봉을 따라 창의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정홍석 병자호란 때 장인 이천봉을 따라 창의
활동 시기/일시 1642년 - 정홍석 사마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정홍석 강학 활동을 위해 낙영재와 양몽재 건립
몰년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정홍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0년 - 정홍석 유허비 건립
출생지 정홍석 출생지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거주|이주지 정홍석 거주지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학교|수학지 정홍석 수학지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활동지 정홍석 활동지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성격 학자|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의병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응(季膺), 호는 운계(雲溪). 증조할아버지는 증 형조참판(贈刑曹參判) 정항(鄭恒)이며,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정언충(鄭彦忠)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정치(鄭墀)이고, 어머니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하수일(河受一)[1553~1612]의 딸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첫째 부인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천봉(李天封)[1567~1634]]의 딸 경산 이씨(京山李氏)이며, 둘째 부인은 학생(學生) 김신(金信)의 딸 언양 김씨(彥陽金氏)이다.

[활동 사항]

정홍석(鄭弘錫)[1607~1671]은 1607년(선조 40) 경상북도 성주군 인곡면 형전리[현,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빼어나 사람들이 모두 뛰어난 아이[기아(奇兒)]라고 칭찬하였다. 실제로 6세 때 아버지 정치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입교편(立敎篇)」과 「명륜편(明倫篇)」만 읽고서도 대의(大義)에 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상(居喪)에 슬퍼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으니, 조문하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 제가 배움을 잃을까 염려하시어 스승에게 나아가도록 하셨으니, 지금 하늘에 죄를 얻어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으나, 어찌 학업을 그만두겠습니까. 그러나 빈소를 떠나 스승에게 나아가는 것은 정리(情理)와 예의에 모두 흠이 되니, 일찍이 배운 책을 다시 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 하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그리고 『시경(詩經)』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었다.

이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장인인 백천(白川) 이천봉을 의병장으로 삼았는데, 이천봉정홍석에게 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정홍석은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이천봉을 따라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물러가자 계획을 그만두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이천봉을 따라 창의하였는데,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시 10여 편을 지어 강개한 심사를 드러내었다. 이후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유명(遺命)에 따라 과거 공부에 종사하여 여러 번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1642년(인조 20)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뒤로는 세속의 일에 관심을 끊고 자연 속에 은거하며 지냈다. 당시 머물던 곳을 ‘운계(雲溪)’라 편액하고, 뜻이 맞는 여러 벗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시를 창수하자,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가르침을 받들었다. 1648년(인조 26)에는 고을 사람들과 함께 낙영재(樂英齋)와 양몽재(養蒙齋)를 건립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규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학도들과 함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며 시서(詩書)를 강학하였다. 이렇듯 후학 양성에 전념하던 정홍석은 1671년(현종 12) 5월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다음 달인 6월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운계선생문집(雲溪先生文集)』 4권 2책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형산(荊山)의 남쪽에 사당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셨다. 1820년(순조 20)에는 후손들이 정홍석 유허비(鄭弘錫遺墟碑)를 건립했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가 쓴 묘갈명(墓碣銘)을 유허비명(遺墟碑銘)으로 삼았다. 지애(芝厓) 정위(鄭煒)[1740~1811]가 행장(行狀)을 찬하였고, 종후학(宗後學) 정화(鄭華)가 묘지명(墓誌銘)을 썼으며, 김황(金榥)[1896~1978]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3.19 내용 수정 정지(鄭墀)→정치(鄭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예리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2024.01.25 내용 변경 [가계] 증 형조 시랑(贈刑曹侍郞) → 증 형조참판(贈刑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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