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8 |
---|---|
한자 | 鄭恩錫 |
영어공식명칭 | Jeong Eunseok |
이칭/별칭 | 겸수(兼受),함재(緘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853년 - 정은석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69년 - 정은석 친모 광주 이씨의 상을 치름 |
활동 시기/일시 | 1871년 - 정은석 이형수의 딸 광주 이씨와 혼인 |
활동 시기/일시 | 1876년 - 정은석 친아버지 정경의 상을 치름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정은석 부인 광주 이씨의 상을 치름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 정은석 사망 |
출생지 | 정은석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거주|이주지 | 정은석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수학|강학지 | 정은석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묘소|단소 | 정은석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신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경력 | 단산서당 강장|성주향교 강장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겸수(兼受), 호는 함재(緘齋).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9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척약재(惕若齋) 정동첨(鄭東[王+詹]), 할아버지는 계남(溪南) 정약(鄭爚)이다. 아버지는 설죽재(雪竹齋) 정경(鄭[土+敬])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상운(李祥運)의 딸이다.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이형수(李瀅秀)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은석(鄭恩錫)[1853~1930]은 1853년(철종 4)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9년(고종 6)에 어머니상을 당하고 1876년(고종 13)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는데, 전염병 및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를 갖추어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이에 일가친척들도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장례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상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큰아버지인 정렴(鄭[土+廉])의 후사로 들어가 종자(宗子)[종가의 맏아들]의 제사를 받들었다. 이후 중년에 부인상을 당하게 되자 몸소 어린 두 아들의 양육에 힘썼는데, 주위에서 재혼을 권해도 본처와의 의리를 중시하여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정은석은 재종숙(再從叔)인 진암(進庵) 정교(鄭墧)[1799~1879]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스승 정교로부터 듣게 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 종사하는 한편, 사서육경(四書六經)에서부터 주자서(朱子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을 반복해서 숙독하며 의리를 깊게 연구하였다. 또한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효(孝)를 매우 중시하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렸다. 이뿐만 아니라 유학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으면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제자들에게 한결같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심성(心性)과 이기(理氣)의 설에 있어서는 면재(勉齋) 황간(黃幹)[1152~1221]의 ‘처지에 따라 [달리] 본다[隨地頭看]’는 설을 위주로 하였다. 일찍이 속유(俗儒)들과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나이가 들어 명망이 두터워지자 거듭해서 단산서당(丹山書堂)과 성주향교(星州鄕校)의 강장(講長)을 맡았다. 저술한 글은 모두 명백하고 간략하며 이치에 맞았으니, 겉모습만 꾸미는 글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원고를 따로 모아 두지 않았으므로, 문인들이 여러 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집한 글을 토대로 1986년에 이르러서야 『함재선생문집(緘齋先生文集)』 10권 1책이 영인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신리의 추산(鶖山)[혹은 추산(楸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삼종손(三從孫)인 정래봉(鄭來鳳)이 행장(行狀)을 짓고, 이종열(李鍾烈)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했으며, 권용현(權龍鉉)이 묘갈명(墓碣銘)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