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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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煒 |
영어공식명칭 | Jeong Wee |
이칭/별칭 | 정집(鄭集),사집(士集),휘조(輝祖),지애(芝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740년 - 정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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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1년 - 정위 대산 이상정에게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772년 - 정위 백불암 최흥원에게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796년 - 정위 관찰사가 통경과 행의로 천거하였으나, 병으로 사양 |
활동 시기/일시 | 1797년 - 정위 온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여 만에 사직, 숙야재 중건 후 『숙야재명(夙夜齋銘)』 창작 |
몰년 시기/일시 | 1811년 - 정위 사망 |
출생지 | 정위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
수학|강학지 | 정위 수학지 - 경상북도 안동시 |
수학|강학지 | 정위 수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 마을 |
묘소|단소 | 정위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산57-17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경력 | 온릉 참봉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집(集), 자는 휘조(輝祖), 호는 지애(芝厓).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언제(鄭彦濟)이고, 할아버지는 정동리(鄭東里)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정지복(鄭之復)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경헌(金景瀗)의 딸이다.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후손이자, 박성부(朴聖溥)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위(鄭煒)[1740~1811]는 1740년(영조 16)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통경(通經)과 행의(行誼)를 이유로 조정에서 누차 관직을 제수했으나, 병을 핑계로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다. 1797년(정조 21)에 온릉 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었을 때는 임금의 명을 계속 거부할 수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봉직했다가, 1개월여 뒤에 바로 고향 성주로 되돌아왔다. 이후 정구가 건립했던 숙야재(夙夜齋)를 중건한 뒤, 독서와 강학으로 평생을 일관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독서했으며, 조금 자라서는 죽옹(竹翁) 홍우귀(洪禹龜)[1701~1767]에게 나아가 기형지설(璣衡之說)을 배웠다. 이후 1771년(영조 47)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 1772년(영조 48)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을 만나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선조인 정구로부터 전해 내려온 가학적(家學的) 전통도 착실하게 계승하였다. 가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학통을 종합적으로 계승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관직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지만, 세속의 영리(榮利)에는 욕심이 없어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성리서를 탐독하면서 고향 성주에서 자질(子姪)들을 가르치며 학문 연마에 몰두하였다.
정위가 특히 주목했던 학문 분야는 바로 심학(心學)과 예학(禮學)이었다. 심학과 관련해서는 『숙야재명』을 지어 이황의 심학이 정구에게로 계승된 측면에 주목했고, 『심경발휘고이(心經發揮考異)』를 써서 정구의『심경발휘(心經發揮)』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학과 관련해서는 여러 선현의 견해를 참고하여 『가례휘통(家禮彙通)』 8권 4책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 문집으로는『지애선생문집(芝厓先生文集)』 7권 2책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산57-17에 있으며, 한강 선생 묘역 내의 묘소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행장(行狀)은 이상정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호곡(壺谷) 유범휴(柳範休)[1744~1823]가 찬했고, 묘지명(墓誌銘)은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이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