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2 |
---|---|
한자 | 鄭東翼 |
영어공식명칭 | Jeong Dongik |
이칭/별칭 | 남위(南爲),오재(鼯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737년 - 정동익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777년 - 정동익 생원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97년 - 정동익 영릉 참봉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98년 - 정동익 사릉 참봉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02년 - 정동익 사망 |
출생지 | 정동익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거주|이주지 | 정동익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수학|강학지 | 정동익 수학|강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경력 | 영릉 참봉|사릉 참봉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남위(南爲), 호는 오재(鼯齋).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창재(鄭昌載)이고, 할아버지는 정복흠(鄭復欽)[1677~1726]이며, 아버지는 정달제(鄭達濟)이다.
[활동 사항]
정동익(鄭東翼)[1737~1802]은 1737년(영조 13)에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의 갖말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후로는 고향인 성주에서 시서(詩書)를 강학하며 일생을 보냈다. 1797년(정조 21) 12월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1798년(정조 22)에는 사릉 참봉(思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된 뒤에도 줄곧 성주에서 활동한 듯하다. 이는 당시 예조(禮曹)에서 “정동익이 성주에 거주하기에 제삿날에 맞춰 해당 능으로 올라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며 관원의 교체를 요청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정동익은 부친 정달제와 마찬가지로 노론계 인사들과 학문적 관계를 유지했고, 실제로 부친과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노론계 산림(山林)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1772]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스승 김원행에게서 “나의 도(道)가 남쪽으로 갔다.”라는 뜻의 ‘오도남(吾道南)’ 세 글자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김원행의 문집인 『미호집(渼湖集)』에는 「정동익에게 답하다[答鄭東翼]」라는 제목의 서간문이 5통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정동익이 태극도(太極圖) 및 예학(禮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동익의 이런 학문적 성향은 동향(同鄕)의 매와(梅窩) 백필진(白弼鎭), 한서(寒捿) 이수진(李秀鎭) 등에게로 이어졌다. 문집으로 『오재집(鼯齋集)』 4권이 필사본의 형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