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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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大年 |
영어공식명칭 | Jeong Daenyeon |
이칭/별칭 | 경로(景老),사암(思菴),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명환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 고조할아버지는 증 호조판서(贈戶曹判書) 정선경(鄭善卿)[1395~1442]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정비(鄭秠)이며, 할아버지는 증 호조판서(贈戶曹判書) 정원운(鄭元耘)이다.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전(鄭荃)[1475~1513]이고, 어머니는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묘서 영(宗廟署令) 이인홍(李仁弘)의 딸로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이다.
[활동 사항]
정대년(鄭大年)[1503~1578]은 1503년(연산군 9)에 경상북도 성주군 인곡면[현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노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와는 크게 달랐으며, 나이 겨우 11세 때 부친을 여의어서 모친으로부터 바른 행실과 도리를 배우게 되었다. 조금 자라서는 외삼촌인 신거관(愼居寬)[1498~1564]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하니, 학업이 날로 성취되어 사람들이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 예견하였다고 한다.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에 급제한 뒤, 1532년(중종 27) 2월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이 끝나지 않아 유가(遊街)[과거 급제자가 풍악(風樂)을 울리며 시가(市街)를 행진하던 일]는 행하지 않았다. 이후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이어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된다. 명나라에서는 조그마한 물건도 탐내지 않아 그의 외종조부(外從祖父) 조원기(趙元紀)[1457~1533]와 함께 널리 칭송을 받았다.
1533년(중종 28)에는 형조(刑曹)·예조(佐郞)·병조(佐郞)의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 당시 정대년은 문무를 모두 갖추었으나 사무 처리에 더욱 능하였는데, 특히 송사(訟事)를 다스릴 때에 잘못을 들추어 냄이 매우 교묘하였다. 일례로 형조(刑曹)에 있을 때 거짓 관인(官印)을 만들어서 미워하는 이를 무고(誣告)한 자가 있었는데, 정대년이 사실 관계를 바로잡으니, 무고를 당한 사람이 길에서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말머리에서 절을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534년(중종 29)에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이윽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체직(遞職)되었으며, 이어서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외삼촌인 신거관(愼居寬)이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의 병칭]에 있었기에 규정상 옮겨갈 수 없었으므로,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地坪)에 제수되었다.
1533년(중종 28)부터 1539년(중종 34)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춘추관(春秋館)과 승문원(承文院)의 관직을 겸임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 있을 때는 당시의 권간(權奸)인 윤원형(尹元衡)[?~1565]과 김안로(金安老)[1481~1537]를 탄핵시키고자 수차례 임금에게 간언을 하였으니, 이를 통해 불의에 굴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후 1546년(명종 원년)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부임하였으며, 1547년(명종 2)에 임기가 끝나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수령들의 하과(夏課) 결과를 아뢰었다. 이때 어떤 수령이 관아의 쌀을 윤원형에게 뇌물로 준 일이 있었는데, 윤원형이 정대년을 만나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해당 수령에게 낮은 점수를 부여하였다.
1552년(명종 7) 가을에는 모친을 모시기 위해 외직을 청해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양주는 한양과 가까운 곳이어서 경내(境內)에 장사를 지내는 사대부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백성들이 동원되어 곤궁함이 매우 심하였다. 이에 정대년이 이를 일체 허락하지 않자, 1년이 채 되지 않아 백성들이 크게 편안해졌다. 다음 해인 1553년(명종 8) 가을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임금과 대면한 자리에서 임금이 민간에 행해지는 폐해에 대해 묻자, 가장 먼저 ‘묘 만드는 일에 백성들이 동원되는 일’을 거론하였다. 임금이 비로소 그 폐단에 대해 알고서는 전국에 명하여 이를 모두 금지시켰으니, 이에 양주의 백성들이 정대년의 은혜에 감격하여 비를 세워서 그 덕을 칭송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대년은 사람들을 시켜 그것을 모두 부수게 하였으나, 이후 정대년이 경기도관찰사로 옮겨 가자, 고을의 백성들은 부서진 비석을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1562년(명종 17)에는 철원부사(鐵原府使)로 부임하였는데, 불교가 성행하였기에 임금의 명을 가탁(假托)하여 이단(異端)을 배척하니, 수령들이 두려워하며 모두 명을 받들었다. 당시 철원부(鐵原府) 남쪽에 위치한 보개산(寶蓋山)에 큰 사찰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백성들의 사유지를 빼앗아 사찰로 귀속시키고자 내수사(內需司)에 아뢰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허락이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나, 정대년은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568년(선조 원년) 3월에 임금이 경연(經筵) 자리에서 육조(六曹)의 판서(判書)가 될 만한 자가 누구인지를 묻자, 좌우의 대신들이 모두 정대년을 가장 먼저 천거하였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제수하였으며, 다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제수하였다. 그해 6월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고, 7월에는 판윤 겸 도총관(判尹兼都摠管)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572년(선조 5) 3월에는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에서 허황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계속해서 체직을 요청하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578년(선조 11)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관직 제수가 계속되었으니, 이를 통해 그에 대한 조정의 기대를 엿볼 수 있겠다.
[묘소]
묘소는 원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인해 1986년에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산2-2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대년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이를 알게 된 정대년은 사람들을 시켜 그것을 모두 깨뜨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경기도관찰사로 옮겨 가자, 양주 백성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사후 이암(頤庵) 송인(宋寅)[1517~1584]이 행장(行狀)을 짓고,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1595~1645]이 시장(諡狀)을 썼다. 신도비는 1640년(인조 15)에 건립되었는데, 전면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지은 것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