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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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來錫 |
영어공식명칭 | Jeong Naeseok |
이칭/별칭 | 치인(致仁),고헌(顧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808년 - 정내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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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정내석 유일로 천거되어 선공감 가감역관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정내석 부호군, 돈령부 도정 가설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87년 1월 - 정내석 가의대부에 오르고 동지돈령부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87년 2월 - 정내석 자헌대부로 승계 |
몰년 시기/일시 | 1893년 - 정내석 사망 |
출생지 | 정내석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거주|이주지 | 정내석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수학|강학지 | 정내석 수학|강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경력 | 선공감 가감역관|동지돈령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인(致仁), 호는 고헌(顧軒).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돈(鄭墩)이다.
[활동 사항]
정내석(鄭來錫)[1808~1893]은 1808년(순조 8)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의 갖말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881년(고종 18)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에 제수되었으나, 신병(身病)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였다. 이듬해인 1882년(고종 19)에는 부호군(副護軍)·돈령부 도정 가설(敦寧府都正加設)에 제수되었다. 이후 1887년(고종 24) 1월에 나라에서 나이 80세인 자에게 한 자급(資級)씩을 가자(加資)해 주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른 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제수되었고, 2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계(昇階)되었다.
한편, 1885년(고종 22)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1842~1896] 등이 여씨향약(呂氏鄕約)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합하여 성산향약(星山鄕約)을 제정할 때도 함께 참여하였다. 성산향약은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 있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종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1년(고종 28)에는 이진상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가 성산향약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성산향약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내석은 어려서부터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읽고 사색하며 실천하여 한 시대의 무거운 명망을 짊어지게 되었다. 한강 정구로부터 이어져 온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심경발휘(心經發揮)』를 탐구했으며, 경학(經學)에도 조예가 깊어 『간서수록상목편(看書隨錄常目篇)』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회연유회(檜淵儒會)의 대표로서 파리 장서 사건(巴里長書事件)에 가담했던 치당(恥堂) 이현창(李鉉昌)[1855~1930] 등이 있다. 문집으로 1898년(고종 35)에 간행된 『고헌선생문집(顧軒先生文集)』 8권 4책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가 만시(輓詩)에서, “신안(新安)[성주의 옛 이름]에서 스승이 된 늙은이는, 문목(文穆)[한강 정구의 시호]의 집안에 걸맞은 후손이었네.[新安秉拂老 文穆稱家孫]”라고 칭송한 말을 통해 성주 지역에서 정내석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