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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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崑壽 |
영어공식명칭 | Jeong Gonsu |
이칭/별칭 | 정규(鄭逵),여인(汝仁),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충익(忠翼),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538년 - 정곤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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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5년 - 정곤수 별시 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정곤수 식년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정곤수 의금부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정곤수 전생서 직장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정곤수 별시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정곤수 파주목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정곤수 강원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6년 - 정곤수 좌부승지·우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정곤수 황해도관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정곤수 동지돈령부사 겸 오위장·성균관 대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정곤수 한성부좌윤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정곤수 청병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 사행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정곤수 판돈녕부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정곤수 예조판서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정곤수 좌찬성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정곤수 사은 겸 변무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 사행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정곤수 공신에 녹훈 |
몰년 시기/일시 | 1602년 - 정곤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4년 - 정곤수 호성공신 일등에 녹훈, 서천 부원군으로 추록, 영의정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02년 - 정곤수 유계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11월 3일 - 정곤수 묘역 파주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 |
출생지 | 정곤수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 |
거주|이주지 | 정곤수 이주지 -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
수학지 | 정곤수 수학지 -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
수학지 | 정곤수 수학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
외가|처가 | 정곤수 외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 |
묘소|단소 | 정곤수 묘역 -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38 |
사당|배향지 | 유계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예조판서|좌찬성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윤증(鄭胤曾)이고,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정응상(鄭應祥)[1476~1520]이며, 생부는 부사맹(副司猛) 정사중(鄭思中)[1505~1551]이다. 생모는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종조숙부 정승문(鄭承門)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후 규에서 곤수(崑壽)로 개명하였다.
[활동 사항]
정곤수(鄭崑壽)[1538~1602]는 9세 때 종조숙부 정승문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가(養家)인 한양에서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본가 및 선영이 위치한 성주에도 자주 드나들었으니, 성주에 계신 생모 성주 이씨에게 문안을 드린다거나,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에 선영에 대한 성묘를 청원한 데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567년(명종 22) 식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572년(선조 5)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됨으로써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576년(선조 9)에 치러진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로는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공주목사(公州牧使)·상주목사(尙州牧使)·파주목사(坡州牧使)·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모든 일을 법도에 맞게 처리하였기에 부임지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한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에는 백암(柏巖) 김륵(金玏)[1540~1616]의 건의에 따라 장릉(莊陵)[단종의 능]에 사묘를 세우고 위판을 봉안하는 등 단종(端宗)의 복권을 위한 조치를 시행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의주까지 선조(宣祖)를 호종하면서 청병 진주사(請兵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의 원정을 이끌어 내었으며, 국내에서는 영위사(迎慰使)·접반사(接伴使) 등이 되어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597년(선조 30)에는 명나라의 도움에 감사하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를 해명하기 위해 사은 겸 변무 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러한 공적들을 인정받아 1602년(선조 35)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러 차례 녹훈(錄勳)의 명이 내려졌다.
[학문과 저술]
정곤수는 1543년(중종 38)에 종조숙부인 정승문을 따라 한성의 호현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으로 옮겨 갔는데, 이때부터 반곡(盤谷) 송세형(宋世珩)[?~1553]·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1588]·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1512~1554] 등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중호에게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우선적으로 배우면서 학문의 방향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후 1565년(명종 20) 봄에는 성주에서 생모인 성주 이씨의 성묘를 마친 뒤,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1542~1593]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찾아가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때 이황은 이들에게 ‘주충신(主忠信)’을 강조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정곤수는 ‘주충신’ 세 글자를 항상 가슴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로도 정곤수는 이황에게 자주 서신을 보내 난해처(難解處)를 질의하곤 하였다.
문집으로 『백곡선생집(栢谷先生集)』 4권 4책이 1710년(숙종 36)에 간행되었다.
[묘소]
정곤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38에 있는데, 2009년 11월 3일에 파주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601년(선조 34)에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과 함께 공신에 녹훈되었다. 사후인 1604년(선조 37)에는 호성공신 일등(扈聖功臣 一等)에 녹훈되고,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으로 추록(追錄)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 후 약 100년 뒤인 1702년(숙종 28)에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야로(野老) 이순(李淳)[1530~1606], 설봉(雪峯) 박찬(朴澯)[1538~1581]과 함께 배향되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이 행장을 지어 그 행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