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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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以兪 |
영어공식명칭 | Jang Iyu |
이칭/별칭 | 자유(子裕),지분헌(知分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옥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장이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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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장이유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장이유 지분(知分)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1660년 - 장이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57년 - 장이유 이양서원에 배향 |
출생지 | 장이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
묘소|단소 | 장이유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
사당|배향지 | 이양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인동(仁同) |
대표 관직|경력 | 퇴계 선생의 무고를 신변하는 소를 지을 때 참여|장현광을 천곡서원에 배향할 것을 주도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인.
[개설]
조선 후기 성주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고 인조와 효종조에 활동한 문인이다.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옥산(玉山)]. 자는 자유(子裕), 호는 지분헌(知分軒). 증조할아버지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도의로 교제하던 장잠(張潛), 할아버지는 호조참의에 증직된 장곤(張崑)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유생이자 임란 의병장이었던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이고, 어머니는 창원 유씨(昌原兪氏)로 유수지(兪遂之)의 딸이다.
선대로는 고려 때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 시조이고, 그 뒤에 덕령부윤 장안세(張安世) 및 김해부사 장중양(張仲陽) 부자가 고려가 멸망 후 물러나 옥산 집에 거주하였다. 조선조에는 장수남(張脩南)이 있다.
[활동 사항]
장이유(張以兪)[1598~1660]는 1598년(선조 31)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608년 선조가 승하했을 때, 나이 겨우 10세였으나 고기를 먹지 않으며 군신 간의 분수를 지켰다고 한다. 1613년(광해군 5)에 종제들과 함께 인동 종가에서 여러 달 동안 글을 읽으며 공부하였다. 1615년 봄에 예를 갖추어 한강 정구에게 가서 수학하였고, 여름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가서 인사하고 공부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따라 무흘정사에 가서 장례를 치르고, 그대로 머물며 공부하였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고, 1635년(인조 13) 퇴계(退溪) 선생의 무고를 신변하는 소를 지을 때 참여하였다. 1642년(인조 20) 고을에 통문을 돌려 장현광을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천곡서원(川谷書院)에 배향하였다. 1654년(효종 5) 성주군에 작은 집을 지어 ‘지분(知分)’이라 쓴 편액을 걸었다. 지분은 ‘부모된 분수로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된 분수로는 효도해야 하고, 신하된 분수로는 임금을 공경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서, 장이유는 이를 실천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1660년(현종 1)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지분헌문집(知分軒文集)』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소야(蘇野) 박곡(朴谷) 언덕에 있으며, 부인도 합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57년 경상북도 성주군 이양서원(伊陽書院)에 배향하였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행장을 지었고, 제목은 「성균진사지분헌장공행장(成均進士知分軒張公行狀)」이다.